내가 타는 지하철은 맨 앞 칸이 가장 널찍하다. 수차례 반복된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종점역인 서울역에 도착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탑승객들이 내린다. 그때 작은 문을 열고 나오는 기관사와 만나는 경우가 있다. 생각보다 젊고 앳된 모습에 놀라곤 한다. 내가 상상하는 열차 기관사의 모습이란 낡은 제복을 입고 주름 있는 얼굴을 한 일본 영화 ‘철도원’에 나오는 지독한 원칙주의가 같은 모습인데 막상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에어컨 고치러 온 젊은 기사 아저씨 마냥 어리다. 심지어 장가도 안 간 것 같은 청년이 나온다.
내 나이를 실감한다. 하긴 이제 나도 나이가 나인지라 군인, 경찰, 소방관과 같이 단어 뒤에 ‘아저씨’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직업군에서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많아졌다. 평생 젊을 줄 알고 살다가 문득 내 나이를 인지하게 되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에세이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의 작가 이도훈 역시 표지 뒷면에 붙은 작가 프로필 사진을 보아하니 어려 보인다. 열차 기관사라기보다는 빈티지 캐논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을지로 같은 데서 힙한 사진을 찍으러 다닐 것 같은 포스가 풍긴다. 거기서 내 고정관념과 첫 번째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진 편견과 조우한다. 이 책의 재미는 그 지점에 있다.
지하철 기관사의 생리현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주 교대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정도로 치부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속편 ‘이번 역은 신통방통 지하서울입니다’가 나와봐야 알 일이다. 왜냐면 이도훈 작가는 부산 지하철 기관사이기 때문이다. 앱을 열고 찾아봤는데 부산 2호선의 경우 양산역에서 장산역까지, 끝에서 끝까지 1시간 반이면 간다. 반면에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인천역에서 연천역까지, 끝에서 끝까지 약 3시간이 걸린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기관사 교대 방식에 어떤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든다.
하지만 급똥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풀어야 할 숙제 중에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에 해당하기 때문에 당장 해결책을 찾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급똥적인 면에서) 기관사라는 직업이 조금 더 곤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책에서 몇 가지 대처 방안을 소개한다. 그중에 ‘똥 대기’(교대 근무자)도 있다.
어떤 직업에 대해 이렇게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 본 게 처음이다. 지하철 빌런을 대하는 그들의 생각, 자살에 대한 트라우마, 희열과 보람, 어디서 먹고 뭐 하며 쉬는지, 어떤 시험을 쳐서 어떻게 기관사가 되었는지까지 그들의 입장에서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그 점이 참 재미있었다. 책표지는 마치 웹툰같이 웃긴 에피소드가 많아 보이게끔 마케팅되었는데 사실 것보다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관사와 어느 허름한 노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요즘 어때’라는 멘트로 시작해서 그의 에피소드를 술술 듣는 그런 느낌이 든다.
“거 왜 버스 운전기사들 보면 운전하다가 양쪽에서 서로 마주 보며 지나치는 경우에 가볍게 경례 같은 인사를 하잖아. 지하철도 그런 게 있나?”
“아 그거 교행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런 거 있지. 한 번은 말이야”
하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지하철 기관사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시험 쳐서 들어갔냐?”
“졸라 빡세. 일단은”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다.
지하철 안은 전쟁터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때론 웃고 때론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문안에 틀어박혀서 거 한번 나와보지도 않고 히키코모리 마냥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지하철 기관사. 도대체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혹시 운전은 자동모드로 해놓고 한 손엔 컵라면 다른 손엔 휴대폰을 들고 낄낄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더운데 에어컨도 안 틀어주고(이 부분도 상세히 해명해 준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내 멋대로 그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쭉 듣고 보니 음 그들도 참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를 읽으며 다른 직업군에서도 글 쓰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고깃집 사장님, 올리브영 직원, 남자 미용사, 인터넷 설치기사, 아이돌 연습생과 같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분야에서 활약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을 확인하는 시간과 그것이 무참히 깨지는 경험 그리고 ’아 그럴 수 있겠네‘ 하며 공감하고 웃고 즐길 거리가 많을 것 같다.
누구나 각자 가진 이야기가 있다. 하물며 정적일 것 같은 지하철 기관사도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그걸 남기려는 노력 그 두 가지가 전부다. 내가 가진 세계는 나에게만 당연한 것이고 타인에게는 특별하고 신기한 현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표현하고 남기는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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