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극의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 하나를 취하면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날씬하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거나 늦게까지 마시면 안 된다. 잘 먹고 마시면서 슬림 해지는 비법이 있다고? 해 봤잖아. 그런 건 없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게임이나 친구를 멀리해야 한다. 만족을 지연시키며 참고 미루어 현재 중요한 걸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한 가지를 가지면 반대편 것은 포기해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목에 결절이 발견되었는데도 담배는 피우고 싶다.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삼겹살과 소주가 먹고 싶다. 특히 불안감과 초조함이 있다면 스트레스 풍선이 계속 부풀어 올라 나를 자꾸만 쾌락의 곁으로 밀어낸다. 편안해지고 싶다. 취해서 잊고 싶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과도 안다. 다음날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건 내일 일어날 일이고 지금 몰라 그냥 먹자. 아니야 오 제발 안돼. 이렇게 오락가락하게 된다.
유혹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방법을 ‘동기부여’라고 부른다. 그게 있으면 참을 수 있다. 성공을 시각화하기 위해 대저택과 비싼 외제 자동차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놓는다. 끌어당김 법칙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오직 성공한 내 모습만 상상한다. 기적의 아침을 만들기 위해 명상하고 글쓰기를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유지해서 진정한 성공 바라기가 된다면 삼겹살이나 게임 따위 개나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그걸 어떻게 매일 하나. 인위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의지가 약한 동물이다. 유혹을 따라가게 만들어졌다. 거봐라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도 결국 사과를 입에 물었다. 하물며 우리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유혹을 뿌리칠까. 못한다 못해. 자기 계발? 상술이다. 애초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송영길은 그의 책 ‘시대 예보: 핵개인화의 시대’에서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 썰을 풀었다. 원래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퍼져가야 하는데 인류는 그걸 자꾸 억제하고 증가하지 못하게 막음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만들고 욕망을 에너지화하면서 발전을 도모했다고 한다. 비슷하다. 인간은 원래 욕망과 쾌락을 좇아 무질서하게 퍼져나가야 하는데 그걸 억지로 어느 한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에너지를 모으는 게 바로 ‘자기 계발’이다. 취지는 좋은데 방법이 좀 거칠다. 조금 더 평화적인 게 없을까?
그래서 말인데,
이런 생각은 어떨까?
다시말하지만 선택을 했으면 그와 상극에 있는 다른 것은 당연히 가지지 못한다. 선택과 버림이 동시에 존재하는 건 낮과 밤처럼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래도 둘 다 가지고 싶은 건 아기 같은 욕심이 불과하다.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치킨이 먹고 싶다. 그럼 나는 글쓰기냐 치킨이냐를 두고 선택을 해야 한다. 먹으면 못쓴다. 먹고 나서 쓴다고? 안된다. 맥주도 마실 거니까. 너무 당연스럽게도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뭘로 할까? 먹으면 살이 찐다. 밤늦게 먹으면 더 찐다. 안 먹으면 안 찐다. 뭘로 할까?
선택을 했으면 나는 그쪽 길로 가기로 한 거니까 뭐 딱히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데 만약에 아쉽거나 후회가 된다면 그 다음번에는 그런 선택을 안 하면 된다. 안 하고 싶은데도 자꾸 생각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면 진단을 해야 한다. 결핍이 있는지 중독이 된 건지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매일 야식을 먹으면서 뚱뚱한 내 모습에 좌절을 하거나 연습을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면서 실력 없음을 원망하는 건 선택한 것과 안 한 것까지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놀부 같은 심보다.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도 있는 것 같다고? 첫 문장에 쓰지 않았나. 없다. 없다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선택에 있어 조금 더 신중할 수 있다. 버려야 하는 걸 떠올리며 선택을 하게 된다는 거다. 오늘 술을 마시면 숙취까지 고려했을 때 이틀에서 삼 일간은 글쓰기에 영향을 줄 것 같다. 그래도 마실 건가? 응 가서 조금만 먹지 뭐. 지금 헬스장에 안 가면 돈도 돈이지만 몸무게도 1~2kg 늘어날 수 있는데 그래도 안 갈 건가? 응 내일 좀 더 뛰지 뭐.
그렇게 몇 번 시행착오를 겪고 선택에 대한 만족감을 분석하고 나면 다음번 비슷한 선택에 있어 영향을 줄 것이고 점점 보다 발전적이고 의미 있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어째 내가 너무 인간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가. 자기 계발 쪽 사람들처럼 ‘해라, 마라, 해야 한다, 말아야한다’며 윽박지르고 몰아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게 맞을까. 글쎄.
이솝우화에도 있지 않나. 인간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는 태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 필요하다고. 사람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큰소리로 몰아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그 안에서 느끼고 올라오게 하는 무언가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그걸 ‘공감’이라고 하는데 이 글이 공감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안 됐다면 내가 더 연습해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