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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Jan 08. 2023

드라이브 마이 카

어느 날 문득,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자살자에 비해 현격히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결국 이곳은 살만하다는 뜻일까? 결국은 어찌어찌 살아지더라는? 물론 자살은 적극적 행위를 하는 것이니 그냥 살아가는 것에 비해 강행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대다수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걸까?  


지난해 내게 최고의 영화였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이번 재개봉 때 다시 봤다. 영화 속 주인공 가호쿠는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이다. 그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 바냐 역으로 주로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연극 <바냐 아저씨>  소냐가 긴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청각장애인인 여성이 로 연기를 한다. 수어로 불행을 표현하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끝나고도 오히려 메인 스토리보다 기억에 남는다.


* scene 1

(바냐가 의사 친구에게 모르핀을 훔친다. 자살을 계획하려고. 이를 안 소냐.)


소냐: 아저씨, 모르핀 가져갔어요? 돌려주세요.

왜 자꾸 우릴 놀라게 해요? 돌려주세요, 아저씨.

아저씨 못지않게 저도 불행해요. 그렇지만 절망하지 않잖아요. 제 삶이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참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자기 인생을 참고 견뎌요. 하나뿐인 소중한 아저씨, 부탁이에요. 돌려주세요.

우리를 가엾이 여겨 이 슬픔을 참고 견뎌요.



* scene 2

(마지막 장면. 바냐가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난 후. 소냐 역할 배우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절망에 빠진 바냐를 위로한다.)


바냐 : 정말 괴롭구나. 이 괴로운 마음을 네가 알아준다면.

소냐 :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사이)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


영화에선 소냐 역을 맡은 청각장애인 여성의 과거도 짧게 언급된다. 유산을 겪고 댄서로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었을 때 이 글로벌 연극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연기를 하는 여성의 불행, 이 연기를 보는 주인공 가후쿠의 불행이 관객에게 전해진다. 가후쿠가 말하곤 하는 '무언가가 일어난다'. 연기를 하는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운명이 우리를 휘감을 때, 이것이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을 때 어찌하면 좋을까.

<바냐아저씨>에서 바냐와 소냐는 결국 열심히 일할 뿐이다. 물론 현대인 관점으로는 답답하기만한 결말이다. 열심히 일해서 죽고난 후 하늘에서 알아주는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소냐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한 존재다. 우울한 투덜쟁이 바냐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역할이다. 소냐는 바냐보다 20살 이상 어리지만 오히려 더 성숙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 체홉이 그리는 소냐는 당시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 아닐까 싶다. 불행을 겪고도 하루하루 열심히 참고 견디며 일하는.

 

몇 달 전 제주도 산방산에 있는 산방굴사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길이었다. 나는 평일에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혼자 여행 중이었고, 내 앞에 오르던 중년여성도 어쩐 일인지 혼자였다. 휴가 기간이 아니라서 그 계단에, 그 시간엔 우리 둘 뿐이었다. 여성이 계단 위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뒤편에는 송악산과 바다가 보였다. 날이 좋아 풍경이 아름다웠다.


여성은 송악산 방향으로 천천히 합장을 했다. 입에선 감사합니다, 가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45도 정도 방향을 틀어서 또 다른 방향으로 역시 천천히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내리며 합장했다. 감사합니다. 다시 또 45도 정도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한껏 낮추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8번이나 인사를 했다. 나는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추월하지 않고 그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느낀 건 감사함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천지신명을 향한 감사함을 느낀 게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이 여성이 겪었을 상처였다. 사방이 아니라 팔방에 합장하며 깊이 기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숙명을 겪어야 했을까. 마침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에 감사하게 되기까지 이 여성은 무수한 일을 겪었으리라. 이것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일에 기도도량인 산방굴사에 오르며 그런 합장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신을 향한 감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는 곁에 인간들에게 더 자주 하는 게 옳다고 여긴다. 교회를 떠난 후 앞으로 내 평생 실체 없는 존재에게 고마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도 때때로 살아있음, 그 한 가지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겪은 게 더 깊어지면 아마 나도 누가 있든 말든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사방팔방에 기도하며 살아가겠지. 제주도 바다는 아름답고, 산과 오름은 우리 상처를 씻기게 해주니까. 세상을 향한 보이지 않는 기도가 누군가가 보기에 서글프 아름답게도 느껴질 테고. 소냐의 강한 의지가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 영화 안에는 여러 가지 스토리가 중첩되어 있는데 가후쿠의 이야기는 체호프 대본을 21세기에 맞게 각색한 것 같다. 상처가 있는 이들에게 하마구치류스케 감독은 말한다. 우리는 결국 괜찮아질 거라고. 우리는 괜찮아질 순간을 기대하며 여전히 살아간다. 열심히.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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