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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Feb 19. 2023

자살은 흔한 일


어떻게 죽고 싶은지?

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엔 50대가 넘어 하얀 옷을 입고 남자친구 혹은 남편과 조용한 방에서 동반자살을 하고 싶었다. 50대쯤 되면 다 살았다 생각 줄 알았다. 그리고 하얀 옷 입고 정돈된 방에서 죽는 일이 나름의 낭만이 있을 줄 알았다. 애인과 함께 죽으니까 덜 외로울 것도 같고.


시간이 지나 보니 50대 아쉬울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다. 그럼 적당한 나이에 혼자 방안에서 하얀 옷 입고 죽으면? 그건 자살이든 뭐든 간에 고독사가 되는 게 아닌가? 한 달 뒤쯤 발견되겠지. 이건 좀 아닐 것 같았다.


고전 문학에서 주인공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 위대한 문학이 되기도 했다.

젊은 베르테르 슬픔의 베르테르도,

햄릿도, 

안나 카레니나도,

희곡 갈매기의 뜨레플레프도,

광장 이명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독자들은 얼마나 충격을 느꼈을까? 왜 주인공이 자살해야만 했는지를 고민하고 주변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의 상황도 어렵고, 갈등하는 캐릭터라 타당성 있는 죽음으로 보였다. 명작이 되었다.


요즘 문학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살하지 않는다. 간혹 나오긴 하지만 흔하진 않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상에서 흔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살을 생각하지만 자살은 본인에게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자 결심이. 보통사람들에겐 스에서 접하는 흔한 일이다. 화는 대체로 현실을 반영하기에 여전히 자살이 흔하다. 학은 대체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가장 이상한 면이나 살펴봐야 할 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우리가 자살하려는 주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삶이 그렇지 못하니 자살로 내게 어떤 인상적인 맺음을 남기려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나 몸이 아파서 자살하는 경우는 좀 다르다.) 


헌데 '자살하고 보니'라는 영화를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족친들 모두 괴로워하겠지만 결국 남은 자들은 일상을 살 게 아닌가. 내 죽음은 이 세상에 작은 균열을 주었을 뿐이다. 따라 죽을 줄 알았던 애인도, 죄책감을 느껴야할 사람도 나 없이 살아간다. 허무하여라, 그래서 자살은 최후의 보인가 보다.


요즘 나는 88세쯤 길에서 객사를 꿈꾼다. 매일 오후 볕이 적당히 따듯해질 무렵 휴대용 비치의자를 들고 바닷가 모래밭에 나가야지. 파도, 모래, 하늘이 풍부한 그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소음을 들으며 느긋하게 낮잠을 취하다 나도 모르게 돌아오지 않는 잠에 빠졌으면 좋겠다. 객사지만 내 죽음을 주변 사람이 많이 슬퍼하지 않을 것 같고, 나도 그만하면 꽤 살았으니 서럽지 않을 것 같다. (88세쯤 되면 또 더 살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객사는 고독사와 달리 적어도 하늘 곁에 있니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꽤나 고독했던 삶이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미소 지으며 죽지 않을까. 안다, 뜻대로 죽기는 어려운 일. 어쨌든 소망할 수는 있으니까.


이런 최후를 꿈꾸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더라. 1kg 의자 들 정도의 체력, 볕을 누릴 정도의 시력, 도보 10분 정도는 걸을 수 있는 다리, 바닷가 근처 집을 구할 정도의 재력(부산은 무리일 테고 다른 소도시). 그리고 스스로 내 인생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평가할 마음.


마지막으로 지난 내 삶을 돌아볼 때 내게 서운할 사람이 없어야하고, 내가 존재해 좋았던 사람이 꽤 있야한다. 러기 위해서 난 오늘 만난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웃어주려고.  마지막 날에 해처럼 떠오를 사람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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