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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Sep 26. 2024

삶과 죽음 중 무엇이 더 숭고할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서평


버튼을 누르면 5분 내로 사망한다는 안락사 캡슐 '사르코'가 지난 23일 스위스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용자는 면역계 질환을 앓고 있었던 64세 미국인 여성이었고, 관련 단체에서는 그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평화롭고, 빠르고, 품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토록 평화로운 죽음을 만들어 사르코의 사용료 단20달러에 불과다.


그녀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왔는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그 고통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수감자들이 겪었던 것보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든 더 큰 고통이었을지 역시 감히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빅터 프랭클이 끝없이 강조하는 '삶의 의미'를 그녀가 완전히 잃어버렸으리라는 것이다. 빚더미에 몸을 뉘인 가족들을 바라보며 죽어가거나, 목을 매달아 길게 혀를 늘어뜨리거나, 두개골을 처참하게 깨뜨리는 대신, 슐에서 우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녀는 판단하였.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사르코 기사를 읽고 지인들과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정확히는 주식투자와 연관된 다소 차가운 이야기)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이 책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삶의 의미와 의지 따위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꾸 사르코에 탑승한 그녀가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사르코 캡슐로 걸어 들어가기 전 빅터 프랭클을 만났더라면, 프랭클은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그녀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까? 극심한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참을 엘리베이터에서 서성이다 기어코 옥상으로 올라간 초등학생이라거나, 홀로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다 본인도 불치의 병에 걸려 '살인 후 자살'(소위 '동반자살')을 선택한 어머니는 어을까.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나는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를 들으면, 역설적이게도 눈물겹게 아름다운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발걸음으로 조슈아의 시야에서 사라지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귀도에게 '삶의 의미'는 조슈아와 사랑하는 아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끔찍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나는 아들 조슈아만큼은 그곳에서 꽤나 행복했을 거라 믿고 싶다. 그곳이 어디건 간에, 귀도의 눈물겨운 사랑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귀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들 조슈아가 없었다면, 냉혹한 수용소의 현실을 감히 게임으로 위장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귀도가 만약 조슈아를 일찍이 잃었다면, 수용소의 극심한 고통을 다지도 의연하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라면? 나의 '삶의 연장'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삶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결국 찾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참호 속에서 땅을 파고, 빵이 배급되는(만약 배급이 된다면) 오전 9시 반이나 10시─ 30분 동안의 점심시간 ─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감독에게 ─ 그가 마음씨 좋은 사람일 경우 ─ 지금이 몇 시냐고 계속 물어보고,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빵을 장갑도 끼지 않은 언 손으로 살살 만지다가 손톱만큼 떼어먹어 보고, 그러다가는 마지막 남은 의지력으로 빵을 도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오후까지 참겠다고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상황을 말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종종 과게 공감하곤 하는 나에게 이 책은 꽤나 큰 괴로움을 주는 책이었다. 완독 하는 동안 수없이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첫 눈물을 터뜨리게 한 대목은 바로 위 구절이었다. 내가 유난히 먹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10온스도 안 되는 그 작은 빵을 손톱으로 살짝 긁어먹고, 남은 빵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둔다는 그 대목에서 참을 수 없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 책의 묘사가 너무도 구체적이라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는데, 이 구절은 특히나 내게 그들이 짐승처럼,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처절한 인간처럼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2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1억 권 이상 판매되었다는 저서이지만, (독일을 제외한다면)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 국민들만큼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은 또 없 것이다. 우리 역시 어릴 적 교과서에서부터 수많은 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일이 자행한 만행수도 없이 접해왔다. 그렇기에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 만약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독립투사가 되었을지 혹은 악랄한 앞잡이가 되었을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면 포악한 카포가 되었을지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을지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과연 나는 일제강점기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신념이 나의 생존에 결국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까. 어린 시절에는 '자살'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벌벌 떨던 내가 이제는 이렇게나 무뎌진 것을 보면, 자살을 다룬 뉴스를 보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라는 문장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을 보면, 내가 나이를 참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때로는 '죽음'이 '삶'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는데 다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고민하는 스스로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내가 그 시절 아우슈비츠수감되었다면, 터져 나오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끄럽게 엉엉 우는 바람에 제일 먼저 가스실로 보내졌거나, '카포'에게 사바사바 해서 가라앉은 감자 몇 알을 더 받아먹는 파렴치한이 되었을 것 같다. 독립투사가 될 용기는 없되 또 앞잡이가 될 만큼 강단(?)이 있지도 못한 인간이라 카포는 아무래도 어렵겠지. 창씨 개명쯤은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고르라면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바로 이 문장이다. 서두의 고백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좀 거북했을 것 같다. 그는 정신과 의사라는 지위 덕택에, 다른 이들에 비해 어쨌거나 분명한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더라면, 관리자의 가정문제를 차분히 들어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었더라면, 환자들을 수송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더라면, 이 책은 애초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가진 능력과 적과도 같은 몇 가지 행운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빅터 프랭클이라는 자를 영원히 알지 못했으리라.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이 책이 나에게, 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가 겪은 극심한 고통과 처절한 기억을 정갈한 언어로 남겨내어 고통에 허덕이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에 놓인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로고테라피'라는 이론을 정립해내기도 했다. 그러한 학구열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 그곳에서 그를 버티게 한 요소이자, 그를 결국 '두 번째 삶'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주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마지막 셔틀에 몸을 실었다면 해방을 앞둔 하루 전 날 밤 화장터와 같은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수 있고, 더 일찍이 그의 올곧은 신념을 아니꼽게 여기는 관리자에게 맞아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또 끊임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찾아내었기에, '신이 있다면' 기적을 행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살려내고 싶었으리라. 다른 가엾은 인간들을 위하여.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남긴 회고록을 읽으며, 나는 또 사무치게 반성하고, 또 뒤돌아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또 안도하고, 나의 상대적 행복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했다.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인해 죽은 이의 물건을 탐내거나 다른 사람의 발을 슬며시 밟았을지라도, 감자 몇 알을 위해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을 내려놓았을지라도, 결국 살아 돌아온 그들에게 누가 감히 손끝을 겨눌 수 있을까.


나의 신념과 대척되는 을 가진 자이건, 나에게 상처를 입혔던 자이건 간에 지금 시련과 고통 앞에 놓여있다면, 그들 모두안녕과 평안빌뿐이다. 그가 나를 두들겨 팼던 카포일지라도. '신'이라 불리는 어떤 초월적 힘이 알아서 그들을 벌할지니.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고 저버린 카포라면, 어차피 그에게 주어진 시련 앞에 쉽사리 무너져버릴 테니. 하지만 끝끝내 자기 자신을 꽉 붙들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라면,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감히 그들을 집어삼키지는 못할 것이다.


2024년 9월 26일, 서른한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KHJ

1. 책에서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오직 생존만이 우선시되는 참혹한 수용소 상황이 묘사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극한의 상황이나 시련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로 인해 달라진 점이 있는지 공유해 주세요. (주변사람 이야기나 유명한 사례도 좋아요)


2. 카포(Kapo)는 수용소에서 수감자 중 일부가 맡은 감시자 역할입니다. 그들은 수감자이면서도 다른 수감자들을 통제하는 이중적 위치에 있었는데요, 이러한 역할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극한의 상황 속 타락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들의 권력 행사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 논의해 봅시다.


3. 수용소 생활이 길어질수록 고통을 마주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내면의 세계로 깊이 빠져 사색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고통을 예술로 표현하거나 유머로 승화시키는 방식이 있죠. 여러분이라면 이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각자의 고통 극복 방법을 공유해 주세요.


4. 저자는 고통을 마주하고 이겨낼 때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고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극복해 내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때로는 더 큰 좌절을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통은 극복해야 할 것 vs 그저 받아들여야 할 것,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5.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니체)' 여러분은 어떤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내 삶의 의미를 공유해 주세요.


6. 현대인은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이 아님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합니다.(우울증, 공격성, 약물 중독) 의미 상실이 왜 이렇게 빈번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7. 이 책은 나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생존한 프랭클 박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인간은 그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강인한 존재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접근, 또는 그가 의사로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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