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정말 헌신이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 스포주의


이 책을 읽기 몇 해 전 리메이크 작인 한국 영화 <용의자 X>를 먼저 봤었는데, 리뷰 사이트에 좋지 않은 평이 많은 것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 딴에는 꽤 재밌고 흥미로웠던 영화가 혹평을 받는 것을 보고 '원작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렇게들 난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더라. 영화도 나름대로 훌륭했으나, 이 책을 본 독자들에겐 얼마나 아쉬웠을지. 나는 영화를 이미 본 사람인지라 반전을 다 알고 이 책을 읽는 건데도, 문득 등골이 오싹했다.


'헌신'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시가미의 그릇된 사랑. 처음엔 이시가미의 사랑 방식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나는 이시가미에게 완전히 몰입해버렸다.


목적을 잃고 부유하던 이시가미에게 야스코 모녀는 단순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또 다른 삶의'방향'을 제시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시가미와 유가와는 여태껏 순수학문으로서의 수학과 과학에만 집착하며, 수식이나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모든 비논리적인 것들은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삶에는 사랑도 연인도, 가족의 그림자도 없다. 오직 논리와 증명만이 존재할 뿐이다.


유가와는 그나마 어설픈 사회적 지위라도 얻었으나, 이시가미의 삶은 팍팍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결국 이시가미는 그러한 삶에 허무함을 느껴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다. 하지만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우연히, 운명처럼 야스코 모녀를 마주하였고, 그것이 이시가미에게는 전환점이자 트리거가 되었다. 아주 작은 울림이었으나, 야스코 모녀로 인해 이시가미는 처음으로 수학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유가와는 이시가미가 그 좋은 두뇌를 이런 곳에 그릇된 방법으로 낭비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물론 이시가미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 방법은 분명 잘못되었기에 그를 비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수학적 증명'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과 연민의 대상을 위해 그의 두뇌를 사용했다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다. 증명 자체만으로, 복잡한 수식을 풀어내는 행위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꼈던 이시가미였으나, 그 어떤 아름다운 수식과 증명도 '사랑'에 비할 수는 없다. 수학과 과학은 물론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학문이지만, 결국 모든 학문은 '사람'을 위해 쓰일 때 더욱 가치있다.


그는 괴물이 되었으나, 가슴 뜀과 동시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문제풀이나 증명이 아닌, 사랑을 위해 본인의 논리를 사용할 수 있음에 그는 충만함과 행복감을 느꼈으리라. 그렇다면 그것은 야스코 모녀를 위한 '헌신'이나 '희생'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시가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KakaoTalk_20220621_135014191.jpg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가와와 이시가미를 뛰어넘는 천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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