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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Dec 05. 2022

사모아의 리퀴드 러브: 사랑은 낭만적이어야 하는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저서, <사모아의 청소년> 서평

 바야흐로 사랑 역시 ‘풍요 속의 빈곤’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시대이다. ‘사랑의 경험’이 전에 없이 풍족해지고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자, 우리는 사랑이란 기술이며, 학습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슴 한 켠에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는 한탄 역시 드높아졌다. 에리히 프롬의 수많은 말들 중 하필 도입부에 해당하는 “사랑도 기술이다”만 가져와 안도감을 느끼는 이들과, “영원한 건 없다”며 짐짓 냉소를 지어 보이는 이들이 한 데, 또는 한 몸에 뒤섞여 있다. 사랑에 관한 한 결코 해소되지 않는 이 인지부조화를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저서 『사모아의 청소년』을 통해, 서구 사회와 동떨어진 사모아의 문화를 비교하며 환경의 영향을 강조했다. 그의 사모아 연구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보다 양육의 영향이 클 수 있다는 점과, 따라서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서구화가 진행되기 이전, 1920년대 사모아의 문화 중에서도 특히 사랑에 관한 문화 특질을 조명하여, 현대 사회에서 사랑과 관련하여 존재하는 어려움에 대해 두 문화간-환경적- 차이를 중심으로 비교해 보기로 했다. 따라서 연구가 진행된 시점의 사모아에 대한 서술은 현대 사회에 대한 서술과 마찬가지로 현재형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나는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보다 명확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미드는 사모아인들이 일반적으로 성에 몰두해 있다고 기술하는데, 이 점은 앞으로의 전반적인 서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모아에서는 성적 동기로 유발된 행동들과 외설적인 유희가 모두 자연스러운 활동이자 매력적인 오락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과는 반대로, 낭만적인 사랑의 지위는 일상적인 성적 유희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한다.

 사모아의 성 문화에 있어 우리와 가장 구별되는 점 중 하나는 동성애 경험에 대한 사모아인들의 인식이었다. 사모아에서는 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청소년기에 발생하는 가벼운 동성애 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성적 욕구가 크고 표출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동성애가 성적 욕망 배출 창구 중 하나로 기능하기 때문에 동성애 행위가 자연스럽고 즐거운 오락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성 청소년 사이의 가벼운 동성애 관계는 장기적으로 유의미한 사건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가 인식되는 방식과 비교해보자.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 특히 레즈비언 경험은 남성과 ‘본격적인’ 관계 맺기 이전의 일시적인 방황으로 취급되어, 유의미하게 해석될 기회를 갖지 못한채 존재는 비가시화되고 부정된다. 그러나 자기승인을 거치지 않은, 비교적 일시적인 동성애 경험은 오히려 과도하게 압도적인 경험으로 취급되어 당사자의 성적 지향을 규정하게 되는 모순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모순되게 보이지만, 두 경우 모두 동성애 혐오와 성적 억압에 기인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사모아에서도 동성애 관계가 유의미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현대 사회와 일부 공통점을 갖지만, 우리 사회에서보다 성 경험에 대한 평가가 일관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경향의 원인은 매우 다른 지점에 있다.

 사모아에서는 이성애 관계 역시 유의미하지 않다. 사모아인들은 며칠 또는 길어봐야 몇 주의 기간으로 낭만적인 정절을 평가하며, 평생을 가는 깊은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비웃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의 결혼생활은 현대 사회에서보다 침해받거나 깨지기 쉬우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사모아인에게는 성적 억압이나 성적 감정의 복잡한 개별화가 없으므로, 혼인은 열정과 사랑과 같은 일시적인 감정보다 두 사람의 조건이나 사회적 관계와 같이 실질적인 이유에 의해 성사되고 유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모아의 가구 집단이 일상에서의 협업과 경제적 상호 의존이라는 조건으로 함께 묶인 이들로 구성된다는 점도 이와 관련 있다. 친족 관계가 아닌 아이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가구 구성원이 될 수 있는 느슨한 가구 집단에서는 혈연관계의 중요성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낭만적 사랑의 지위가 낮은 곳에서는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성애적 관계가 유의미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동성애 관계의 성행위 방식이 이성애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인정되며, 사모아 사회 특성상 동성애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힘은 개인 간의 애정과 애착이라는 점도 동성애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사모아에서 낭만적인 사랑의 지위가 이토록 낮다는 사실이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우리는 사랑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시도하며 기대한다. 다음번 사랑은 현재의 사랑보다 훨씬 완벽에 가까울 것이라고. 물론 그 다음번 사랑보다 더 짜릿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의 이상향에 균열이 생기면 얼른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반복.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모두는 훌륭한 탐험가이자 실험가의 자질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다. 에로스는 존재자들의 이원성에 있고, 이원성은 사랑의 파토스이다. 결국은 독립된 두 개체는 완전한 합일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갈망하는 한,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섹스라는 일시적인 접착제로 완전한 합일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환상일 뿐이다. 오르가즘이라는 몇 초간의 황홀경 동안 경험했던 일시적인 결합의 순간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 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며,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좌절감은 극대화된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는 육체적인 결합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분리되어 있으며,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될수도 없기 때문이다. 섹스가 사랑과 한쌍인 것으로 여겨지는 탓에 합일로 가는 길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것뿐이다.


 사모아인들은 이러한 통찰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랑과 섹스를 필연적으로 결부시키지 않고, 섹스를 두 존재의 영원한 합일로 가는 길로 여기지도 않는다. 리비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그것에 영혼을 의탁하지 않으며, 생활을 함께할 동반자를 찾는 일은 별개로 존재한다. 우리가 사랑이라 믿은 결과로 반복적으로 느끼는 쓴맛은 어쩌면 “끊임없이 나오는 불순물을 폐기하고 청소하는 즐거움"과 사랑을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하지는 않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욕망은 소비하고 싶어하고 사랑은 소유하고 싶어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이고, 대상을 완전히 파헤쳤다고 생각되면 우리는 또 다른 흥미로운 대상을 향해 길을 나선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대상을 자신 안으로 삼켜 몸집을 불리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사랑이 완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편안하고 ‘완벽함’을 느끼는가? 그러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또 다른 욕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고리는 끝나지 않는다. 혼인이라는 제도와 서약으로 묶어 두어도 흐르는 욕망과 충동은 제어할 수 없고, 욕구와 당위의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자신과 상대방 중 하나를 골라 단죄하고 괴로워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부분이 결국 배설욕구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상황은 보다 편안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나오는 불순물을 배출하고 또 다음 때를 기다렸다 반복하는 행위를 우리는 연애와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 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모아인들이 사랑에 대해 좀 더 ‘수월한’ 태도를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느슨한 가구 구성과 억압되지 않고 단순한 성적 감정, 낭만적 사랑에 대한 회의적 시각 등 밖에는 어떤  영향 요인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와 관련있다. 사모아의 아이들은 친족의 삶과 죽음-섹스, 임신, 출산, 사망-의 사건들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출되고, 보호자 중 누구도 그런 상황이 어린 아이에게 유해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사모아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감정적 충격을 동반할지언정 금기나 불길한 사건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배설에 대한 사모아인들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배설은 감추어져야 하고, 표백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모아에서는 정상적인 배설과정에 관한 수치심도, 프라이버시도 없다. 아이들은 배설과 같은 신체기능에 대한 말로부터 섹스에 관한 말 만큼이나 커다랗고 은밀한 만족을 얻는다. 이 예시를 생각해볼 때, 사모아인들은 우리보다 생리적 카타르시스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 같다. 카타르시스는 배설 욕구로부터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섹스도 넓은 의미에서는 배설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나이에 따른 책임과 권리의 경계가 명확하다는 점도 기여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특히 여성 청소년-이 어른스럽기를 기대받는 동시에 아이로 취급되어 혼란이 가중되는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얼마든지 아동기를 연장하며 성인기를 유예할 수 있기 때문에 내적 갈등이 적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사모아의 문화에서는 상쇄와 수용이 두드러진다. 순종을 요구받던 아이는 청소년기에 아랫사람들에게 권위를 표출할 수 있고, 억압받던 개성은 춤을 출 때 장려되고, 능력을 중시하지만 미숙한 아이를 격려하기를 더욱 중시하고, 집에서 불편을 느끼는 아이는 언제든지 다른 집으로 가버릴 수 있다. 또한 ‘비이성적‘, ‘비합리적’이라 여겨질 만한 감정은 ‘무수 태도‘라는 개념 아래 존중받는다. 사람의 본성과 행동을 분리하여 행동을 ‘좋은’과 ‘나쁜‘으로, 품성을 ‘쉬운’과 ‘어려운‘으로 평가한다는 점도 도움이 된다. ‘이유 없이 화를 많이 내는’ 이도 비정상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 그대로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다. 사모아에서 ‘어려운’ 아이는 있지만 ‘나쁜‘ 혹은 ‘비정상적인’ 아이는 없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사모아에서는 우리보다 신경증이 덜 규정되고, 또 덜 유발된다. 자극-되먹임 기전도 적다. 수용적인 동시에 억압된 감정이나 충동을 분출하여 해소할 창구가 마련되어 있고, 기질과 감정에 대한 낙인이 적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언급한 사모아의 특징에, 복잡한 내면적 갈등이 적고 사생활 개념이 부재하며 낙인이 없다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개인은 자유롭게 성적 욕망을 표현 및 해소할 수 있고, 자연히 일대일 집중 관계에 덧씌워진 신화는 벗겨진다.


 결국은 사랑과 섹스의 분리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둘은 너무나도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불륜’과 ‘선섹후사', ‘섹스리스’와 관련된 논란들이 사랑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과만 섹스해야 하는가? 한 번에 한 명의 섹스 파트너만 두어야 하는가? 더 이상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사이가 되면 사랑이 끝난 것인가? 그렇다면 함께하던 삶을 끝내야만 하는가? 애초에, 사랑과 무관하게 연애나 결혼 생활을 결정하고, 또 사랑이나 관계의 정의와 무관하게 섹스를 해서는 안 되는가?

 사회적 규범으로만 본다면 위 질문들에 대해 고민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학습하여 알기 때문에, 어떤 것이 부도덕하고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어찌하여 절대적인  합리성을 갖는지, 다른 문화에서 온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어야만 한다는 결심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불가능한지는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다. 잠시 시간을 함께 보내기 좋은 친구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유용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동료, 성적인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파트너, 언제든 쉴 곳이 되어주는 가족과 같이, 우리는 필요한 요소들을 충족하기 위해 복수의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왜 파트너에 한해서는 한 사람에게서 정서적 안정과 일상적/경제적 협동, 자녀 출생 및 공동 양육을 모두 찾는 것에 더해, 수십 년간 일정하게 배타적으로 성 관계를 맺어야만 하다는 맹세까지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정말로 그것이 가능하고,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믿어서 그렇게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연애 규범과 성적 억압, 사랑의 과잉 낭만화를 비판하는  나 역시도 사실은 누구보다도 낭만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꼭 붙들고 살아간다.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고, 파트너가 다른 사람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낀다면 좌절하고,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섹시하다는 말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이에게 끌림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렸다는 파트너를 존중하고, 파트너의 지나간 연인들 또는 우리 곁을 스쳐가는 매력적인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 묻고 진심으로 동조하고 진솔하게 대답하기도 한다.

 여전히 베개 옆에 외로움과 절망감을 누이고 잠드는 밤이 많지만, 적어도 위와 같은 순간들 만큼은 모든 혼란과 질투, 분노와 슬픔이 사라지고 나의 이상과 현실이 통합되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사랑은 전에 없이 안전하고 즐거워진다. 잡히지 않는 것을 붙들어 매려 애쓸 때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성질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풀어 놓기를 허용할 때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사랑과 섹스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요구이다. 사랑과 섹스는 서로를 더 오랫동안, 더욱 즐겁고 짜릿한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에 관한 문제로 괴로워질 때면 사모아인들의 현실적인 사랑을 떠올려 보자. 수용하고, 인정하고, 느슨하게 바라보자.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낙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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