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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Dec 25. 2022

누군가의 추억 (下)

〔커피값 프로젝트〕 2021. 03. 01. Mon. 초봄호

 평일에 동네 언니의 집에서 눈을 떴던 건 전날 재즈를 들으러 나갔다가 본의 아니게 시장에서 순대와 김치만두 들을 사서 언니의 집으로 몰려왔었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두부 두루치기와 순대와 매운 오뎅 김밥과 김치만두를 여기저기 펼쳐놓고 먹어치우다 우리 이것만 먹고 글 쓰자고 해놓고 드러누워 배 위에 소설책 한 권 엎어놓고 잠에 든 것이다. 그날 나와 동행한 사람은 바로 허겁지겁 휴대폰을 찾아 출근한 또 다른 전포동 언니였다. 그는 어딘가 고독한 예술가를 지향하는 듯한 구석이 있으므로 나는 그냥 그를 예술가라 부르기로 한다. 언니가 보고 있으니 미리 밝힌다. 참고로, 멸칭은 아니다.


 예술가와 나는 맞선장소로 유명한 카페로 향하던 축축한 골목길에서 난데없는 색소폰 소리에 이끌려 어느 7080 라이브 술집 앞에 멈추어 섰다. 불투명한 유리 슬라이드 문 틈새로 들은 색소폰 소리는 흡사 우리가 찾던 재즈의 그것과도 유사하게 들렸다. 예술가가 물었다. 우리 여기 갈래? 나는 가게의 외관을 보며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눈은 사뭇 진지했다. 바로 그때, 맞은편의 횟집에서 느닷없이 한 아주머니가 뛰쳐나왔다. 아가씨들, 술 한 잔 할 거야? 그때는 오후 두 시였다. 아뇨, 그냥 음악이 좋아서요. 술을 안 마시면 무슨 재미로 놀아? 여기는 술 마시러 오는 곳인데. 그러고는 유리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물론 아직 영업시간 전이었다. 아주머니는 소리쳤다. 여기 아가씨 두 명이 술 마신대! 우리는 빠르게 약간의 체념과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일한 비율로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기 갈래? 그래, 가자. 농담이 낙장불입으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두침침한 실내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언니 같은 예술가가 되려면 이정도 용기는 낼 줄 알아야 하는군.


 지상에서 계단 몇 개를 올라 들어간 영업장은 놀랍도록 완벽하게 지하의 꼴을 갖추고 있었다. 불을 다 꺼놓고 난잡한 네온사인으로 주위를 밝힌 그곳은 촉촉보다는 축축에 가까웠고 시원보다는 서늘에 가까웠다. 서면 번화가 일층 상가가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 건너편을 보니, 헛웃음이 나오는 건 예술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맥주 오백 두 개를 시킨 우리는 그 즉시 저 중년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추측하며 낄낄거렸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그 옆에 앉은 여자는 색소폰 연습에 한창이었다. 예술가가 물었다. 저 두 사람, 부부일까? 나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아니, 부부일 수 없어. 저 둘은... 로맨틱한 동료다.


 조롱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곧이어 펼쳐진 광경은 ‘오빠’가 노래하는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는 그에게 초상권이 있으니 찍지 말라고 수작질을 하는 사장, 그리고 다시 천진난만하게 처음부터 찍을 걸 그랬다며 웃는 그.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 사장은 이 공간의 주인답게 기타와 색소폰과 드럼과 보컬을 번갈아가며 선보인 뒤, 로맨틱한 동료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어이, 너도 한 곡 해. 그런 태도였다.


 그는 보니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를 아주 멋들어지게 불렀다. 1977년에 나온 영국 노래를 부르며 nothing을 나씽으로 우아하게 발음할 줄 알았다.


 잇츠 어 헐에이크. 나씽 버러 헐에이크...


 그는 사랑은 바보들의 장난일 뿐이라고 부르짖었다. 오크나무 같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멋져서 우리는 고구마 과자 집어먹던 손을 멈추고 눈썹을 약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래는 사장의 자부심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낸 것 같았다. 사장은 보니 타일러의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마자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이크를 빼앗아가며 말했다. 네, 수고했습니다.


 그때, 유리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소금 하나 없이 삶은 것 같은 감자튀김을 파는 사장이 생계를 위해 받은 수강생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실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이곳은 딱히 저렴한 가격이나 맛있는 안주, 쾌적한 분위기 따위로 손님을 끌어 모으기를 거부하는 듯했고, 그저 자칭 ‘김광석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음악을 계속할 구실로 보였다.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조용한 곳에 내려와서 음악 하는 게 즐거운 거라고 짐짓 허심탄회하게 말했으나 나는 그의 어깨가 약 오 센티미터 정도 올라간 걸 볼 수 있었다. 무대에 선 그의 등 뒤로 ‘쉘브르 라이브가수 정현우와 함께’라고 적힌 대문짝만한 표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사장은 보니에게 마이크를 줄 때와 같은 태도로 수강생을 무대에 세웠다.


 수강생 할아버지는 나훈아의 <내 인생 다시 한 번>을 불렀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무스를 발라 넘긴 그는 아주 점잖아서 되레 머쓱해하는 것도 같았으나, 노래가 시작된 후에는 마치 케이팝 스타의 독기 가득한 참가자 같은 태도로 눈빛을 바꾸었다. 아득히 먼 길도 아닌데 꿈처럼 살아왔구나... 그는 목도리가 방해되는지 아주 다급하게 잡아 뜯었다. 마음은 지난날에 머물러도 세월은 나를 두고 흘러갔네... 이번엔 목을 부여잡고 헛기침을 했다. 본래의 실력은 이것보다 뛰어난데 목 상태가 좋지 않아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듯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목에서 노을빛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그네... 머쓱해하는 와중에도 노래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꼭 한 번만 내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꼭 한 번만 내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헛기침과 점잖이 무색하게 그는 배를 부여잡고 무아지경으로 노랫말을 토해냈다. 그는 거의 절정이었다.


 예술가는 속삭였다. 퇴물들의 잔치로구나... 그러고서 그는 무대에 올라 무려 두 곡을 뽑았다. 그가 겪어볼 수 없었던 시대의 노래였다. 그는 그런 노래들을 마치 직접 쓴 것처럼 부를 줄 알았다. 나는 그의 노래를 그날 처음 들어보았고, 기교 없이 오르내리는 동그라미 모양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 시절의 청바지와 다방과 교정과 벤치가 그립다고. 그의 곱슬한 머리카락과 검은색 안경을 테이블에서 물끄러미 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가 내게 유일무이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마 이런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을 그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망상에 불과했다. 훗날 시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있던 곳의 이름은 ‘추억 속으로...’였고 나는 정말로 상호명의 수작대로 추억 속에 빠져들었으나 문제는 그것이 남의 추억 속이라는 것이었다. 크게 걸린 모니터 화면에 나오던 가사가 모두 들어가고 정신을 차렸다. 겪은 적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종종 미래에 대한 투지나 상승심과도 유사한 파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왜 자꾸만 내 것이었던 적 없는 것들을 이리도 절절히 그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대신 그의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누군가의 추억> 끝.





김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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