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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Jun 19. 2022

프랑스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_(2)

ABC부터 배워 10주만에 DELF B1 취득하기: 용꼬리 전법

우여곡절은 잠시 옆으로 미루어 두고, 선생님의 교육 방식이 효과적이었는지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당신이 5월에 썼던 첫 편에 이어, 한 달만의 두번째 편도 읽고 있다면 분명 그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연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지난 5월에 DELF B1 시험에 응시했고, 4주 뒤인 그제 오전에 결과를 받아보았다.

결과는 합격!


DELF는 청해, 독해, 작문, 구술 네 가지 영역의 총점이 50점 이상이어야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다. 다만 각 영역 만점은 25점으로, 5점 미만일 경우 과락을 받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각 영역별로 최소 5점만 넘고, 네 가지 영역을 다 합해서 50점만 넘기면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반타작'해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중 대부분이 거쳐온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그 이후의 대학교 학점을 떠올려 보시라. 취업하기까지 필요한 수많은 자격증과 공인어학시험들 역시 그러하다. 가령, 학점 2.25점에 토익 495점이라면...

안타까운 상황이기는 하나, 위 시험들의 점수는 응시자의 이마에 아로새겨지다시피한다. 그러나 DELF에서는 50점만 넘겨 합격한다면 '50점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B1 소지자'가 된다. 물론 합격증서에 점수가 표기되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이 세상은 'DELF B1에서 80점 이상 받은 사람을 구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이하의 점수를 받은 사람의 프랑스어 실력은 그닥 신뢰하지 않거든요...'하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를 찾는 공고는 퍽이나 과묵한 편이다. 지원자격: DELF B1 이상 소지자.


같은 의미에서 선생님은 내게 A2가 아니라 B1에 응시할 것을 밀어붙혔다. ABC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게 남은 시간은 단 10주. 나는 틈 나는 대로 부지런히 빌었다.

"제발 제발 A2로 하면 안 될까요? 저 그러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나의 읍소를 칼같이 돌려보냈다. 잘 할 자신 있는 일을 할 기회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잘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안 될 것 같은 일만 골라서 도전해본 적 있는가. 그런 적 있는 자만 자신있게 A2에 응시하라...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단연 B1에 도전할 것임을 안다.

나는 B1에 51점으로 합격했다. 커트라인 50점을 모자람도 없이, 낭비도 없이 넘긴 점수이다. 낭비. 바로 여기에 많은 여성들이 걸려 넘어진다. 어린 여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날개 깃을 떼어내어 크기를 줄이는 '낭비의 협곡'이 있는 것만 같다. 점수와 역량을 넉넉하게 준비해서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고, 예상대로 그곳에 도착하면 남은 능력은 어쩌면 더 멀리 갈 수도 있었을 가능성과 함께 툭툭 털어 버리는. 모자람의 상태가 두려워 차라리 낭비를 택하는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라면, 간발의 차로 불합격했을 때의 아쉬움이나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할 때의 불안과 막연한 후회, 욕심냈던 만큼 커지는 조급증 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태도는 DELF와 같은 시험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가령, A2에 80점 이상으로 고득점하여 합격할 계획을 세우는 방식으로. 모르긴 몰라도, A2에서 80점 이상 받았을 실력이라면 B1에서 50점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50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하든 90점으로 넉넉히 합격하든, A2는 A2일 뿐이고 B1은 B1이다. 둘의 실력이 사실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갖게 되는 자격은 달라진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지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키보다 높은 허들을 뛰어넘을 생각을 감히 해보았을 때 가장 먼저 예상되는 건 아마도 불안이나 후회, 자원에 대한 아까움, 조급증, 창피함 등일 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안 될 가능성이 절반 이상인 일을 해내었을 때 찾아올 성취감, 그 짜릿함을 상상할 때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함께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안전하게 무릎 높이의 허들을 넘었다면 다음 단계를 위해 되레 더 많이 투자해야 했을 돈과 시간, 노력을 아꼈다는 희열.

내 능력과 운의 한계를 시험해볼 때의 감각이다. 이번에 실패했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A2에서 80점으로 합격하고서 다음으로 B1을 바라볼 때보다, B1에서 이번에 48점으로 떨어지고 다시 한 번 도전할 때 목표는 훨씬 만만해지니까. 골대에 손이라도 닿아 보면 '각'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미리부터 창피함 걱정할 것 없다. 그런 우스갯소리를 들어 본 적 있을 테다. "나 서울대 넣었는데 떨어졌잖아~" 또는, "돈이 모자라서 내가 한남더힐을 못 샀잖아~" 사정이야 알지만 어쨌든 좀 다르게 보이긴 한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내게 나 자신을 낭비하는 대신 자원을 좀 낭비해볼 줄 알게 되어야 한다며 더 높은 곳을 향해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뱀 머리 말고 용 꼬리가 되라는, '용꼬리 전법'이었다. 꼬리도 용은 용이니까.

나는 시험료 24만 5천 원이 여간 아까웠던 게 아니다. 이번에 떨어지면 한 번 더 응시해야 하니, 결국 49만 원을 쓰게 될 것이었다. 그 돈이면 우리들의 필수품 닥터마틴을 한 켤레 사고도 남은 돈으로 보다 강력한 상체를 위하여 클라이밍장에도 등록할 수 있을 거였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제주도로 데리고 간다거나...

그런데 사실 그 정도 돈은 어떻게든 쓰게 되어 있었다. 닥터마틴을 사든 이두박근을 기르든 제주도에서 돈까스를 사먹든, 아니면 그냥 한 달 유흥비로 어영부영 써버리든간에 많은 경우 남는 건 다 똑같이 생긴 까만 옷이나 출석률이 30퍼센트도 안 되는 체육관 회원권이나 아이 맛있다- 하고 끝나버릴 감상이었다.

그런데 DELF B1 자격증은 프랑스의 일부 대학에 지원하거나 프랑스어 능력이 필요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정도의 자격이다. B1이 있다면 다음 단계인 B2도 노려볼 만하다. A1부터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빠르게. 그 정도의 프랑스어 실력이라면 캐나다 이민의 가능성도 보다 크게 열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데- 하며 망설일 이유 있을까. 비록 아는 건 데자뷰와 뚜레쥬르 뿐이었지만 그래도 도전해보기로 했었다. 불가능해보이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목표를 향해. 해야 하는 일들은 늘 많았다.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들도 몇 년째 새해마다 일기장 가장 맨 앞장에 적어두기만 한 지 오래였다. 영어를 꽤나 할 줄 알지만, 제2외국어를 배울 시간에 영어나 네이티브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영어나 제대로 해' 하는 비웃음이 예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나중에'만 품고 산 지 이미 몇 년이 되었다면, 이제는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할 일은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많을 예정이었고 하고 싶은 일들은 해보지도 못하고 점점 열정만 잃어가고 있었다. 영어는 당장 해외에 다시 떨어져서 혹독하게 학교부터 다시 다니지 않는 한 어차피 지금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 비슷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영어는 잘 못하지만 불어를 더 잘 한다거나, 영어와 불어를 비슷한 수준으로 잘 하는 편이, 특별한 성과 없이 영어 염불만 외는 것보다 훨씬 멋있고 실용적이다.


무엇보다, 자신 있는 것만 시도하는 묘하게 자신 없는 태도를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번 허들에 발을 걸어보면 그 전과 후의 나는 절대 같을 수 없을 거라는 기대. 그 가설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가설 검증에는 그렇게 커다란 여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어질 편에서는 뻔뻔한 수험생과 까막눈이 공부 방법에 대해 천천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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