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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Oct 31. 2022

전혜린을 좋아하세요…

[커피값 프로젝트] 늦겨울호 2021. 01. 22. Fri.


〔커피값 프로젝트〕 2021. 01. 22. Fri. : 전혜린을 좋아하세요... - 김수빈


  

개다리소반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진저쿠키 부수어 먹을 때 알았다. 앙큼하다 매콤하다 소문 자자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풍문으로 들은 묘사들은 다 틀렸다. 그에 관한 한 오만하고 싶고 한껏 모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아는 척 하고 싶어진다. 그는 오늘 처음 만나 이름 불러가며 친구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척 하지 않고 의뭉스럽지 않은데 뻑적지근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는 내게 단정하는 말보다 부정형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생시를 알아냈다. 전화로 엄마를 채근해 산모수첩과  주름 사이사이를 뒤져보게 했다. 당사자만 알던 비밀을 셋이 나눠 가진  그는  뒤편으로 사라졌다 빼곡한 노트를 가지고 나타나 읽어내기와 내다보기를 마구잡이로 섞어가며 과거와 미래 사이 다리를 놓았다. 누구는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던데 그날엔 이다음에 이어져 열릴 그의 입술 모양 말고는 아무 것도 궁금한  없었다. 도전하거나 요구할  없이 은총 받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듣고 있었다. 산책 나간 개들처럼 여기저기 지도 만들   냄새 묻혀놓고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사람에게는 모두 있다고 믿는다. 대놓고 흩뿌리는  추하기 때문에  다물어야  순간이 적지 않게 오는데 그는   새도 없이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읽어내었다. 훌훌 펼쳐 쌀알 고르듯 집어내기도 하고   그러모아 주무르기도 하고  아래 깔려 멍든 부분과  바깥 튀어나간 알갱이도 분절되지 않는 동작으로 오랫동안 매만졌다. 삽시간에 정수리로 들어차는 시원한 빛과 노곤노곤 풀어지는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입금한 만큼의 교류가 끝나고 나니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에 언제 다시 그와 눈 맞출지 애가 탔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기차 타고 돌아갈 곳이 있으니 주어진 시간에 최소한의 연을 매어두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일었다. 포기하고 책 꺼내 읽었다. 그는 알아보았고 나는 알은체를 했다. 전혜린을 좋아하세요? 동료가 빌려주어 아직 1부도 못 다 읽은 책을 두고 책의 존재를 안다는 이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저자는 책 속에서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혜린을 멋으로 좋아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이제 나도 그 애들에 소속되었다. 조금 아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기란 얼마나 쉽고 유용한가. 그는 아마 이 글 읽고 조금은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날 내가 여간 아는 체를 한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곧 아량을 베풀 것이다. 나로서는 끝내지도 못한 책이라도 알은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면. 책머리를 읽자마자 새 책을 사서 밑줄 그을 것임을 예감했었다고, 그러니 그건 거짓도 허풍도 위선도 아니라 이를테면 대출 같은 거였다고 변명한다면.


뚜껑만 열어본 책 가지고 열네 개 눈동자 틈바구니 눈 맞추고 떠들며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한 공간에 따로 떨어져 나와 시집 하나 사이에 두고 엎드려 누워 좋아하는 문장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밤과 꿈의 뉘앙스. 제목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가 야릇하게 느껴졌다. 종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이따금 눈을 들어 맞출 때는 서로가 숨 들이마신 타이밍이 맞아떨어졌을 때였다. 엎드린 그의 발뒤꿈치 뒤편으로 보이는 한 무리 친구들은 지문 묻은 카메라 렌즈처럼 흐려졌고 우리는 속삭이고 있는데도 귓속말처럼 울렸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전혜린을 선물했다. 받는 이 주소는 스타벅스 벽화 맞은편 집. 그는 문자했다. 수빈 씨 너무 좋아요. 가만히 내려다보면 옷 위로도 심장 뛰는 걸 볼 수가 있다. 철로 위를 달릴 때 느껴지는 진동을 알았지만 굳이 복장뼈 위에 손바닥 가져다 대어 보지는 않았다. 겨우 여덟 글자를 자꾸만 처음부터 읽어보느라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자동 잠금을 삼 분에서 안 함으로 바꾸었다. 어떤 말들은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글자 위를 배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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