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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스윗 Nov 14. 2024

[Hi! Five]사계절, 한 해 : 다섯 손가락 #2

그 걱정이 나를 걱정한 걸까? 내가 없는 너를 걱정한 걸까?


왼) 적혈구수혈, 중)친구의손과 내손의 핏기차이, 오) 혈소판수혈

 나에게 ‘여름’ 언니이자 ‘중지’ 언니는, 여름처럼 쿨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언니였고, 여름에 이식을 했다. '중지'언니인 이유는 언제나 중요한 순간마다 내 곁에 늘 있어주는 존재이며, 다섯 손가락 중 3번째로 알게 된 언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식은 혈액암 환자들의 유일한 완치 방법인 '조혈모세포 이식'을 말한다.
이전의 골수이식보다 공여자 채취과정만 조금 편해진 이식 방법.

• 조혈모세포이식 : 수혈하듯 혈관에서 채취.
• 골수이식 : 허리 뒤 쪽 엉덩이뼈에 두꺼운 바늘을 꽂아서 직접 채취.
( 현재도 골수검사 방법은 동일하다. 골수검사를 수없이 하게 되며 터득한 요령은, 절대 월 초에 하지 말고, 월 말에 할 것! 인턴쌤들의 스킬에 아픔이 크게 좌우된다. )


 나에게는 긴 병마의 시간 속에서 함께 의지하게 된 4명의 언니가 있다. 나를 포함해서 딱 5명. 나는 우리의 이름을 ‘다섯 손가락’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그 ‘다섯 손가락’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끝없이 찾아오는 한 해 한 해를 서로 응원하며 손뼉을 마주치듯 파이팅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름’ 언니이자 ‘중지’ 언니 외에도,

 ‘가을’ 언니이자 ‘검지’ 언니 :  우리 중 가장 먼저 이식을 했으며 환우회에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을 이식 & 환우회 카페의 넘버원 같은 존재 & 2번째로 만난 언니]

 ‘봄’ 언니이자 ‘약지’ 언니 : 기적 같은 희망을 현실에 데려와 반짝이는 삶을 살고 있는

[봄 이식 &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기적을 이룬 존재 & 4번째로 만난 언니] ,

 그리고 나는 '겨울' 에 태어나 '겨울'에 이식을 해서 다시 태어난 '소지', 막내 '새끼손가락'이다.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는가? 바로 ‘엄지’ 말이다.


 오늘은 나의 ‘엄지’ 언니에 대한 힘겨운 마음을 꺼내보고자 한다. 내 마음 안에서 우리를 다섯 손가락으로 생각한 후, 언니들과 나의 이식일이 모두가 다 다른 계절이란 사실을 깨닫고, 단톡방을 만들고 난 후 나의 ‘엄지’ 언니까지 다섯 손가락 모두를 초대했다. 서로의 삶에서 우리의 병을 잊지 않고 조심해야 할 것들과 경험들을 공유했다. 또한, 서로의 생에서 우리의 병이 잊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함께 일상을 응원했다. 그저 우리가 경험한 이 시간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이 생이 얼마나 감사한지 잊지 않고  잘 살아가게 하기를 바라며 만든 대화방이었다. 이들을 알게 된 것은 ‘엄지, 중지’ 둘, ‘검지, 약지’ 둘 따로따로였지만, 서로의 존재를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었고, 직접 소통하면 나보다는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며 힘이 될 수 있을 거란 주제넘은 생각에서였다.


  나의 ‘엄지’ 언니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까지만 해도 이식 전의 상황이었다.(지금의 상황은 알지 못한다.) 나와 같은 시기에 발병했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식을 하지 않은 채 삶을 살아왔다. 그 단톡방을 만들 때에는, '엄지'언니의 이식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나는 우리의 모든 계절의 이식 경험이 그녀에게 분명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계절마다 이식이 반드시 비슷하고 각 계절이 꼭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계절의 특성에 따라 준비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 조금씩은 달랐고, 많은 경험이 모일 수록 풍부한 정보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




 우리의 병은   MDS.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이다. ‘~병’ 이 아닌 ‘증후군’으로 이름 붙여진 이유처럼 모두가 다 다른 증상과 진행양상을 보인다. 우리의 병을 검색했을 때 ‘case by case’란 말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우리의 병을 세분화하는 종류 중 RCMD로 ‘백혈구’는 약간 떨어져 있는 정도, ‘적혈구’와 ‘혈소판’은 매우 낮은 케이스였다. 유전자검사결과 염색체이상은 없었고, 첫 진단당시 아세포의 비율은 1% 미만으로 낮았으나 적혈구와 혈소판 수치가 낮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고 수혈 요구량이 많아 중간예후단계라고 말씀하셨었다.

• 염색체이상 : 유전자의 변이가 어떤 유전자인지에 따라 예후양상이 달라진다.
• 아세포 : 비정상 세포. 보통 암은 형태가 있는 고형암이지만 혈액암은 실체가 없이 정상적이지 못한 세포를 아세포라 하며 일반적으로 암세포의 비중과 많이 비교되어 설명된다.
• 예후 : 이식 진행 과정에서 보이는 병의 패턴양상. 예후가 좋지 못하면 단기간에 사망에 이르거나 이식 후 숙주반응들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 숙주반응 : 원래의 조혈모세포를 항암과 방사선으로 파괴하고 다시 넣은 조혈모세포는 몸에서 처음에 적으로 간주된다. 이전 세포와 새로 자리하고자 하는 조혈모세포의 치열한 싸움으로 안정기까지는 다양한 숙주 반응을 맞이해야 한다. 간숙주나 폐숙주가 오면 사망과 직결된다. 눈으로 오면 평생 실명한 채 살아야 한다. 신체의 온 부분에 서 올 수 있으므로 정말 case by case다. 보통 이식 후 3년까지 몰려오나 10년 후에도 재발과 숙주 반응으로 이별하게 되는 사람들도 보았다.

 

‘적혈구(헤모글로빈)’는 2011년 맨 처음 9 즈음으로 일반인(정상수치 12~17) 보다 크게 떨어지지 않았으나 2014년에는 5로 위급한 상황에 최종 진단 되었고, 수혈 주기를 2달에서(8 이하 수혈) 2주로 점차 줄어들면서 이식 승인이 1년 만에 가능해졌다. 혈소판은 세 가지 중에서 만 대로 가장 낮아 가끔 혈소판 수혈을 받기도 했다.(정상수치 15만~45만) 일상을 사는 것에는 다치지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많이 낮지 않으면 적혈구에 비해 수혈 부작용이 많아 자주 하지 않았으나, 내가 원하는 ‘아이’를 위한 준비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나의 ‘엄지’ 언니는 나와 비슷하게 혈소판이 낮았지만 적혈구(헤모글로빈 hb)는 약으로 잘 유지가 되었기에(수혈 주기가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이식승인이 나지 않을 수 있어 아마 교수님이 이식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시기가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내가 이 책을 쓰고자 하게 된 시작은 사실, 이 ‘엄지’ 언니 덕분이었다. 최종 진단을 받고 이식을 하기까지 1년의 지옥 같은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살아냈던 것 같다. 그 시간에 가장 많은 의지를 한 사람이 바로 이 ‘엄지’ 언니였다. 가장 먼저 알게  된 환우이기도 했다. 다른 언니들도 많은 도움을 받고 좋은 영향을 주고 힘겨움을 나누어주었지만, 유독 이 ‘엄지’ 언니는 나와 성격이 정말 많이 비슷했다. 그리고 더욱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와닮은 성격 속에 나와는 다른 깊고 차분한, 현명함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1년의 시간 동안 때론 지나치게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집을 나가기도 하고, 혼자 사라지겠다고 잠적하는 등, 나의 곁의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가 있었다. 그 시간 속에 그녀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새벽에 늘 함께 해주었다.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걱정해 주며 나와 너무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조언까지 너무나도 진심이었다.

 우리는 그 새벽 외에도 종종 일상을 공유하며 언제가 될지 모를 이식을 위한 준비도, 그저 평범한 삶 속의 일상적인 수다도 이어갔다.


 심지어 나는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 그간의 내 선입견을 내려놓고 다가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와는 다른 모습이 그녀의 ’ 믿음’ 속에서 자라난 모습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궁금해졌던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병원에 가는 날마다, 어색하게 1층 성당을 서성거려 보고 어느 날은 쭈뼛쭈뼛 들어가 보기도 했다. (심지어 종교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지하에 있는 용품판매점에서 묵주팔찌를 두 개나 샀다. - 물론 예뻐서였다. 늘 하고 다니던 염주 팔지가 끊어져 허전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불교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를 따라다니던 절에서의 추억으로 병을 만났을 때부터 자주 절을 찾아다니다 만났을 뿐.)


 아무튼 그녀와의 많은 시간이 날카롭고도 물러터진 나의 그 시간을 위로했기에 날을 무디게 했고 조금은 단단해지게도 했다. 그리고 ‘글’을 써보라는 조언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늘 “너는 참 재능이 많다. 블로그를 써보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라며, 나의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글로 써보며 스스로 위안하고 깨닫기를 추천했다. 많은 환우분들의 블로그를 알려준 것도 그녀였다. 아마도 그녀는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이 병과 함께하며, 많은 정보들을 찾아보며 지낸 삶 혹은 적당히 잊고 사는 삶 사이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겠다.


 뒤늦게 읽어 본 그 당시에 시작했던 블로그의 글은, 그 시간에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두려웠는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의 내용들이라 비공개로 닫아두게 되었지만, 그 글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저렇게 버틴 거구나. 저런 마음으로 그저 하루를 저렇게 버텨내었구나. 살려내었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아쉬운 것들은,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잘 기록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들로 이어졌다. 그래서 언젠가 나의 기록들을 되짚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내용과는 별개로 이 책을 쓰는 것은 병에 대한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닌, 감사함을 담은 책이었다. 나의 힘겨운 한 해에 서로가 제일처럼 아픈 손가락 같은 언니들이 마음으로 늘 함께 있어준 그 시간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지,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은 글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병으로, 비슷한 혈액암의 환우들의 슬픈 결말 외에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의 힘겨운 그 한 해의 속의 나처럼 절망에 지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희망, 아니 그건 너무 큰 마음일 것 같고(사실 그저 살아난 것 만으로 꿈같은 행복이 기다리는 삶은 아닐 수 있기에),  그저 선명한 현실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이런 케이스도 분명 있다고, 그러니 무조건 절망하지만 말라고, 우리의 병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관건이 되는 병이라고.




 그렇게 3년 전, 이 책을 구상하고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까맣게 알지 못했다. 나의 이런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닿지 못할 거 란걸. 아니, 오히려 내가 그간 나 딴에는 생각해서 한 말과 행동들이 누군가에는 나의 의도와 다른 생각지 못한 마음을 갖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두렵고 무섭다. 내가 감히 그 누군가의 생각을 추측한 다는 것 자체가 건방진 마음이지 않을지. 어떤 마음에서 나에게 거리를 둔 것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나의 ‘엄지’ 언니는 이식을 준비하기 시작 할 무렵, 잠시 힘듦을 비추었다가, 나에게서 사라졌다.

 

처음의 사라짐에서는 그저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병으로 알게 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이 지나쳤을 수 있었겠으나,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슬픈 결말을 보곤 했기에, 아프다고 하고 사라진 그녀가 그저 걱정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떠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무렇지 않게 너무들 잘살고 있는 환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도 그리 될지 모른다는 언니의 얘기가 말도 안 된다고 내저으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고,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금 긴 시간이 지나 그녀는 그 결말이 아님을 알려왔다.

 그러나 이 말도 함께였다. “그냥 아무랑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실은 나를 걱정했다는 너의 말이 과연 나를 걱정한 건지, 내가 없는 너를 걱정한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전과 같이 이어진 몇 번의 연락을 지나 끝내 다시 사라졌다.




 나는 이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머릿속으로는 그 말을 곱씹고 ‘내가 정말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일 수 있으니 나의 태도와 언행을 점검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잘못인 걸까’ 3년을 고민해 왔다.


 그것이 가슴에 있다는 것은 오늘 깨달았다. 오늘 치유글쓰기에서 ‘죽도록 미운, 미웠던 그대’에게 편지 쓰기를 하며 떠올리라는 말에 한참을 그 누구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미웠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들은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거의 대부분 이해하고 또한 그들을 응원하는 나 자신을 잘 만들어 내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엄지’ 언니가 스쳤다. 그녀가 떠오른 순간, 나는 참 속상했다. 참 많이도 그녀를 좋아했고, 오랫동안 의지했고, 그래서 참 많이도 아프고 슬펐다. 그 긴 시간 동안 조금은, 아니 마음이 깊었던 것만큼 미웠던 것도 같다. 사실 어쩌면 그 미움은, 그녀를 향했다기보다는 못난 나를 향했는지 모른다.


 ‘나는 왜 기댈 수 없는 존재인 걸까, 나의 마음은 정말 나만을 위한 거였을까? 아닌데, 아니라는 걸 왜 전할 수 없었던 걸까.’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길 바랐던 거란 걸 알았다.


 나의 힘든 그 시간 속에 그녀가 있었고 서로의 삶을 위로하며, 가장 가까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우리만이 알 수 있는 이 병 앞에 두려움을 함께 공감하며 지냈기에, 그녀의 그 시간에도 내가 함께 곁에서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부분에서 내가 부족했는지, 입장이 달라 어떤 생각지 못한 상처를 주었는지, 피하고 싶게 만들었는지 혹은 이런 생각들 조차 주제넘은 것인지, 그저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두 번째의 긴 기다림 끝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혼자 마음을 닫아버렸었다. 나도 나를 지켜야 한다는 못난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 나는 그 행동조차 스스로를 탓하는 부끄러운 후회로 남았다. ‘왜 기다리지 못했을까.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늘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꼭 내게 다시 닿지 못하더라도,

그저 괜찮은 채로 건강히 지내기를.

언젠가 웃으며 만나는 날이 다시 오기를.

우리가 만난 지 10년이 되는 어느 봄을 기다릴

나의 춥고 외롭고 긴 겨울의 시작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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