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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스윗 Nov 10. 2024

[Hi! Five]사계절, 한 해 : 다섯 손가락 #1

우린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지난밤 잠을 이루지 못해 몇 시간을 꼼짝 않고 만든 영상을 보다가, 절묘하게 그 순간 도착한 그의 문자 한 통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느새 눈물로 다 젖은 베개. 또다시 그 축축한 베개로 얼굴을 파묻고, 스스로를 파묻고 있었다.


띠링. 얼굴 옆에 놓인 폰이 울리고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흐리던 눈이 반짝. 글쓰기 계정에서 함께 글을 쓰는 작가님들이나 모르는 계정들로 가득했던 좋아요 사이에, 반가운 좋아요가 눌렸다. 본 계정에 연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톡을 보내려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바로 전화가 울렸다.  


 “무슨 일 있나? 애기 떠났나? 언니가 더 빨리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언니도 사는 게 또 바쁘다 보니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못했네, 계속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끔 네가 작가일 하는 거 올리는 거 보면서 잘 지내겠거니. 안심하고 ‘잘 살고 있네~.’ 하고 있었다.” 이 긴 말을 듣는데, 나는 첫마디부터 이미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후련히 쏟아내고서, 그간의 근황과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전하고, 이제 괜찮다, 더 괜찮아지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언니의 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또이리 연락을 주어 고맙다 마음을 전했다.


 언니는 역시 먼저 나의 건강을 걱정했다. “무슨 마음인지 상황인지 잘 알겠는데, 니 진짜 괜찮겠나. 상황은 그렇다 해도, 니 몸이 버틸 수 있겠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 모르나. 니 그러다 어떻게 될까 봐 무섭다 언니는."  누구보다 잘 지내려 애쓰고 있던 나는,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스스로를 잘 다독이고 살아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의 그 말에 그 굳은 다짐은 한순간 무너져버렸다. "언니  진짜 이번에 다시 출혈이 반복되는 거 보니, 최종 진단 직전이 생각나더라고, 그런데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 지친 상황이어서 그런지 ‘그래. 차라리 이렇게 재발돼서 생이 끝나면, 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더라." 언니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말했다. "그래 네가 그럴까 봐. 이래 걱정이 되는 거 아니겠나. 네가 홀로 다 놓을까 봐. 그 공허함을 네가 혼자 어떻게 감당할래, 아빠도 떠나고, 자식 같은 강아지들도 곧 떠나면, 니 혼자 진짜 어떻게 버틸래. 내가 네 마음 다 알지만, 어때 왔는지도 잘 알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너한테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그런 사람 정말 없지 않나.  네가, 우리가 다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니 진짜 알잖아~. 우리는 알잖아. 지금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얼마나 힘겹게 다시 찾은 건지."



 

 언니와 나는 10년 전 혈액암 환우회 카페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13년 전 혈액 이상 의심으로 추적 관찰을 하던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희귀한 병명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는 그저 아닐 거라 믿으며 3년의 시간을 모른 척 지냈었다. 점차 잇몸 출혈이 잦아지며 마음의 준비를 했고, 병이 확진되었을 때, 가장 먼저 환우카페를 방문했다. 모른 척 지내던 시간에, 나의 그는 환우카페에 이미 가입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는 확진이 되자마자, 링크를 보내주었고 그의 아이디로 많은 글들을 보았다.


 나의 병명은 ‘골수형성이상증후군’ MDS라고 불리는 혈액암의 일종이었다. 처음 인터넷 검색으로 병을 접했을 때,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확률에 반해, 진짜 그 시간을 겪어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경험담이, 아니, 실시간으로 뜨는 그들의 현실이 무서우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처음에는 많이 무서웠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막연히 무서워하기보다는 실체를 바로 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내가 해야 할 것들이 선명해졌다. 많은 분들을 통해 미리 배워놓을 수 있었던 정보들이 가득했고, 그 덕분에 나의 서울행은 순조로웠다. 혈액암 중에서도 나의 병만을 전담진료하는 국내 유일의 교수님을 찾아갈 수 있었고, 앞으로의 치료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하고, 찾아올지 모를 돌발상황에도 대처 방법을 미리 배워 놓을 수 있었다.


 먼저, 주기적인 수혈과 여러 검사와 함께 치료를 언제 시작할지 모르기에 이식 공여자를 찾아 놓기 위한 과정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였던, 오빠의 검사결과는 반일치. 그 당시 반일치 이식이 시작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아 그보다는 안정적인 이식을 위해 100% 일치차를 찾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조혈모세포이식 협회에 조회를 해 봐야 알고, 나온 사람들이 몇 명이냐에 따라, 또한 이식 의사를 묻고 답변에 따라, 검사를 진행하고 또 100% 일치자가 없으면 다음 그룹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했다. 언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도 힘들었지만, 그 과정 한 단계 한 단계마다 드는 비용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비용은 보험처리가 불가하기에 온전히 다 현금으로 부담해야 했다. 일치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찾는다고 해줄지도 알 수 없는 희미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돈이 없다고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반일치이식으로 바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오빠의 100% 일치가 아니라는 검사 결과와 조혈모세포이식에 대한 밑 낯의 설명을 듣는 날, 가장 큰 힘겨움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    


 3달가량 경과를 관찰하며 희미한 희망에 큰돈과 좀먹어가는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다. 검사를 해 볼 수 있는 등록자는 16명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또 옅은 희망을 걸고 기다린 그 끝에는 16명 모두가 이식을 거부했다는 연락이 돌아왔다. 교수님은 오빠와의 반일치 이식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생존율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직 5년뿐이니 쉽게 이식을 시작하자는 말씀을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나의 치료 진행은 느렸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졌다. 병의 진행이 느린 것이 다행이라 생각 드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반대였다. 미래를 꿈꿀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고, 현재에 당장 치료를 시작할 수도 없는 그저 죽어가기를 기다리는 지옥 속에 있었다. 결국 죽음을 향해 가야만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슬펐고, 치료를 한다해도 내 평생 유일한 꿈이었던 ‘엄마와 딸’의 관계를 내 아이와 이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다가오는 죽음보다 두려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채,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카페에 첫 글을 썼다. 결혼을 앞두고 이런 상황이 펼쳐져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현실이 힘들다고. 혹시 난자냉동시술을 한 환우분들이 있느냐고. 글을 쓰기 전에 검색을 통해 찾아낸 정보는, 대부분 목숨을 걸고 그렇게 도전하지 않는다는 글, 그럴 시간조차 없이 상태가 악화되어 이식에 들어간다는 글, 오히려 이식 전 아이를 나았다는 케이스가 있다는 정도였다. 이 모든 슬프고 살얼음판 같은 상황의 케이스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도저히 불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의 사연들과 함께 글을 적어나갔다. 나의 간절한 글에, 비슷한 상황과 마음 가진 사람 몇몇이 공감과 위로의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 진심 어린 댓글 속에, 나의 ‘여름’, 나의’ 중지‘ 언니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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