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4일) 오후 5시 라온이는 대전 유성구 관평동 엘클래식(4층)에서 Christmas Piano Concert를 가졌다. 이 콘서트엔 심라온 외에 오찬영, 임채린, 민준희, 윤연진, 서수현, 이채원, 서지현, 오서현, 최은솔 그리고 이 아이들을 지도한 이나래 선생과 채원이 아버지가 참여했다. 80명 객석 규모의 이 홀엔 친지 가족 40여명이 참석해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 콘서트는 연주자 모두 ‘최고 연주자 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1부 솔로(solo)와 2부 솔리(soli) 연주를 1시간 조금 넘게 감상하면서 이런 감회가 들었다.
‘나 어릴 때와는 완전 딴판인 세상이로구나. (12.3 비상계엄을 전기로 유일무이한 보수논객에서 보수 변절자란 오욕을 뒤집어쓴) 조갑제 선생이 한 말이 참말이구나.’
조갑제 선생은 전 부처 업무보고회에서 대통령이 한 한마디로, 난데없는 ‘환빠(*) 논쟁’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두 전성기다. 김춘추 김유신 김법민 김인문 등은 세계최강 제국 당과 동맹,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이 신라마저 먹으려 하니 7년간 나당결전을 벌여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통일 국가를 세웠다. … 그 뒤 3세기 동안 동북아에 평화가 오고 장안 경주 교토는 세계 5대 도시에 들 정도로 번영한다.
민족통일 국가의 수립으로 한국인은 같은 언어 국토 종교 풍습을 갖게 되어 한민족이 탄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 바탕에서 국민국가로 재탄생한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 이승만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나당동맹에 버금가는 한미동맹을 만들어 평화 번영의 울타리를 치고 박정희의 부국강병 전략으로 중산층과 중화학 공업의 기반을 다지니 민주화 복지화 세계화의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2025년 세계 10대 강대국으로 여기 서 있다.(하략)”
*환빠: 상고사 <환단고기>를 틀림없는 우리 역사라 믿는 이를 이르는 말. 주로 재야사학자(혹은 유사역사학)를 지칭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아시아의 환국이 세계문명의 발상지다. 수메르문명과 인더스문명까지 환국의 영향력에서 태동했다. 환국은 전세계 거의 모든 문명의 조상이다.”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빠 논쟁’을 아느냐고 묻고, 그걸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논쟁이 불거졌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결론낸 강단사학에서는 재야사학의 주장을 일종의 판타지로 여겨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본다. 나 역시 새마을운동사를 시작으로 동학사, 사회적 경제사, 구한말 의병사, 신라사 등을 일별하고 상고사로 치달았다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자칫 나의 글 행로가 방향타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어떤 상고사 연구서는 이 나라 5천 년 역사를 7만 년까지 늘린 것도 있다. 이런 책을 잘못 만나면 삶 자체가 송두리째 구렁에 빠지든지,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두 전성기다.”
연주회 동안 조갑제 선생의 이 말이 뇌리에서 선율을 타며 또로리리 흘렀다. 라온이와 아이들은 이 연주회를 위해 2달간 집중 레슨을 받았다. 각자 이나래 선생이 정해준 2곡을 솔로로 연주하고, 선생과 함께(혹은 아빠와 자매와 남매와 함께) 크리스마스 캐럴 1곡씩을 듀엣으로 연주했다.
나는 처음 연주회 소식을 듣고는 라온이의 참가를 반대했다. 라온이가 생각보다 피아노 과외를 좋아하는 건 다행이지만 생각보다 연습을 하지 않는 건 아쉽다고 여겨온 터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그런 자세로 연주회를 나가본들 시간낭비라 판단했다. 라온이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나래 선생과 무슨 말을 주고받은 끝에 태권도장을 다녀와서는 큰 결심을 한 듯 다부지게 말했다.
“아빠, 나 한번 도전해 볼래. 피아노 연주회 나가볼래.”
흰도복에 검정띠를 맨 라온이 모습이 그날따라 더 멋져 보였다. 스스로 하겠다는 아들을 주저앉힐 아비는 없고 스스로 결단한 아들을 추어주지 않을 아비는 없다.
“그래, 라온아 넌 이번에도 잘 할 거야. 열심히 해봐. 자, 하이파이브.”
1달이 흘렀을 땐 ‘저래서 되겠나’ 싶었지만, 2달이 가까워지자 악보 없이 2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시시때때로 <눈송이 왈츠> 연주를 청했다. 여유를 부리며 장난을 치며 잘 연주해주었다. 이어지는 교향곡도 제법 잘 쳤다. 선생님과 듀엣으로 연주할 캐럴이 제일 어렵다고 했다. 어느 날 라온이가 말했다.
“아빠, 난 연주회 연습이 좋아. 왜냐하면 연주회 연습을 하니까 실력이 엄청 늘어. 그래서 좋아.”
“그래? 아빠도 일취월장인 네 실력을 느껴. 자, 하이파이브.”
“근데 일취월장이 뭐야.”
“나날이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좋아진다는 뜻이야.”
“아하.”
라온이는 스스로 판단해서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분별하는 속깊은 아이다. 일주일 전에 장염에 이어 독감에 걸렸어도 목요일 바둑을 빠지면 다음에 2시간 보강을 해야 한다며, 그러면 총 4시간을 해야 해 부담이 된다며 학교를 나갔다. 장염으로 오른 열이 내리자 사흘째는 아내가 학교에 갈 것을 권했지만 라온이는 하루 더 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라온이에게 스스로 잘 판단해서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더 쉬었다. 나흘째 학교를 다녀오고 다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갔더니 독감이라고 했다. 이비인후과에선 독감 바이러스 치료제 타미플루 수액 주사를 놓는데 실패했다. 이튿날 소아과에서 가서 타미플루 주사를 맞았다. 라온이에게 연주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 힘든 중에도 빼먹은 첫날 레슨을 주말로 변경해 연주회 전 마지막 2번 레슨을 마쳤다. 독감 중에도 할 일을 한 라온이도, 주말에도 시간을 내어준 이나래 선생도 고마웠다.
이나래 선생이 권한 연주회 복장에 따라 라온이는 엄마와 함께 셔츠와 넥타이, 구두, 바지를 골랐다. 쿠팡으로 배달된 셔츠를 빨아 깨끗하게 다리는 건 군대 다녀온 아빠의 몫이었다. 아내의 영에 따라 바지도 함께 날을 세워 다려주었다. 연주할 때 보니 목 뒤로 넥타이 끈이 보여 ‘아차’ 했다. 넥타이를 아내가 매 준 거였다. 2부 연주까지 무사히 마친 라온이가 대기실로 가지 않고 반대편 이나래 선생 쪽으로 갔다. 화장실을 가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긴장도 하고 많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라온이를 따라 나가 엄지척을 해주었다.
“이야, 우리 라온이 참 잘하더라. 멋져!”
쉬를 하는 라온이 뒤에 서서 말했다.
“근데 아빠가 넥타이를 매줄 걸. 목 뒤로 시꺼먼 띠가 보이더라. 그게 좀 아쉽네. 라온이는 어때? 잘한 것 같아? 아빠가 보기에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실수했는데. 캐럴 연주할 때.”
“그래?”
“아빠는 <눈송이 왈츠>가 좀 빠르게 친 게 아닌가 싶어. 박자가 좀 빨랐지 않아?”
“아니. 그건 잘 쳤는데.”
“평소에 아빠가 듣는 것보다 좀 빠르다 싶었어.”
“그래? 아닌데.”
“응. 아무튼 무척 잘했어. 대단해. 들어가자.”
이 연주회 구성원이 재미있다. 좁장한 한국사회, 네트워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싶어 좀은 웃기기도 하다. 이 구성원은 두 갈래다. 교회망(網‧네트워크)과 아내 직장망이다. 이나래 선생은 교인이다. 그 교회에 찬영이, 서현이, 아빠엄마도 다닌다. 찬영이 엄마는 아내 회사의 동료이고, 준희 엄마 역시 아내와 찬영이 엄마의 동료이다. 그러니까 모두가 고만고만하게 안면이 있는 것이다. 해서 처음 봤다고 해도 영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어제 연주회에선 또 하나의 예술이 펼쳐졌다. 찬영이 엄마 최유미 선생이 며칠 전 사무관 승진자에 내정되고 동료들의 화환이 답지했다. 그 많은 화환을 본 최 선생의 동료가 이 꽃들을 아이들 연주회 때 선물로 주어도 좋겠다고 했고, 그 동료가 그 많은 꽃들을 집으로 가져가 수일 애지중지 키우며 연주자들 선물용 꽃다발로 재탄생시켜 온 것이다. 프로모션 플라워 아트(Promotion flower art)쯤 되려나. 이 꽃다발을 우리 라온이도 받았다. 라온이는 꽃다발은 한사코 괜찮다고 해 준비를 안 했는데, 연주회가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가면서 비로소 심중을 드러냈다. 맥락없이 “서점을 가면 안되느냐”는 것이었다.(찬영이 어머니, 사무관 승진 거듭 축하합니다!)
“서점? 서점은 왜.”
“사고 싶은 게 있어서.”
“뭐.”
“<흔한 남매> 6권.”
“아, 라온이는 꽃다발 대신 흔한 남매를 받고 싶었구나. 근데 그건 내일 아빠랑 서점 가서 사면 안 돼?”
라온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주변 서점을 검색했다. 마침 3분 거리에, 10분 뒤면 문을 닫는다는 서점이 있었다. 거기서 라온이는 <흔한 남매> 6권을 취했고, 바론이는 그 결에 색칠책을 한 권 득했다.
우리 라온이는 역시나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아이였다. 나는 아비로서 아들의 이 점을 대단히 높이 산다. 독감 중에도 피아노와 바둑만큼은 챙긴 분별심과 성실함은 아내와 나도 본받을 점인 줄로 안다.
한편 대전 새로남교회 네트워크는 모르긴 해도 성시화운동의 고장 포항이 가진 유별난 교회 망 못지않을 것이다. 새로남교회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대전 사회가 구동되는 분명한 축이 있다. 새삼 대한민국 교회의 생성력(生成力)을 떠올렸다.
내가 보기에 ‘이나래 사단’의 Christmas Piano Concert 영예의 1위는 임라희 선생 아들 민준희 군이었다. 준희는 선율에 몸을 맡길 줄 아는 수준 높은 연주를 선보였다. 피아노와 대화를 나누며 연주했다. 대체로 아이들의 연주는 기계적이고 기능적 연주이기 마련이다. 잘 친다는 건 악보를 틀리지 않게 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연주가 준희처럼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 피아노와 대화하듯 하는 연주다. 이건 달란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준희는 피아노를 전공해도 좋겠다 싶다.(준희 어머니, 참고하세요.)
그다음 1위는 우리 바론(6세)이다. 1시간 넘게 형누나들 연주를 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점잖게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어 대견하고 고마웠다.
라온이를 비롯한 다른 연주자는 공동 1위다. 아이들 모두 ‘최고 연주자’였다.
최연소 참가자 라온이에게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아주 큰 경험이었으리.
나는 라온이와 아이들에 대한 이나래 선생의 깊은 애정을 느낀다. 이 선생의 바깥양반도 어제 처음 봤다. 내외가 웃는 게 닮았다. 궁고재 찻방에 초대해 융숭하게 차를 한잔 대접할까 싶다.
엘클래식 근처엔 내 술친구 처남 권정훈이 산다. 처남에겐 라온이와 동갑인 아들 주원이 있다. 아내가 동생과 조카를 저녁 자리에 초대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졸지에 빽다방 사장까지 된 처남은 열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탓에 대작할 시간이 사라진지 좀 됐다. 라온이 덕에 처남과 회포 풀 자리까지 마련됐으니 어제의 주인공은 라온이가 아니라 아빠인가도 싶다.
2주 전 포항 워크숍을 다녀오면서 대구에 들러 뵌 내 보이차 스승 운경 선생께서 언명(言命)을 주셨다. “심 작가도 이제 오십을 준비하세요. 색소폰 잘 가지고 있지요. 그거 내어서 꾸준히 연습하세요.”
라온이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면서 나는 선생의 언명을 떠올렸다. 피아노 치는 아들, 색소폰 부는 아빠. 내 지천명은 전망이 밝다. <보석다관>에서 운경 선생과 합주하는 날은 상상만으로 즐거운 일이다.
[글밥] 손님들께 연재 중인 본격 ‘관공서 소설’ <잊을 수 없다>를 수습하는 대로 색소폰을 다시 시작할 요량이다.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 김남일 경북도문화관광공사 사장은 <잊을 수 없다>를 읽으며 “황송하다”고 답신을 주었다. <잊을 수 없다> 4장 ‘글학 몸학(예정)’ 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차에서 내리자 대구는 눈송이들이 왈츠를 추며 사뿐사뿐 내려앉고 있었다. 하느님이 여호와가 하나님이 한울님이 부처님이 단군할아버지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제 식솔들에게 축복 주기에 바쁜 날이겠거니, 보통은 넘겨보았다.”
소설은, 시는, 연주는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면 잘 느끼게 된다. 잘 느껴야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 라온이는 아비의 소설도 도왔다. 기특하고도 영특한 라온. 나의 별, 나의 전부 라온.
/심보통 2025.12.15.
*이 글을 지으면서 독주(獨奏)에 상응하는 중주(重奏)가 이탈리아어로 솔리(soli)라는 걸 처음 알았다.<홍정주 음악사전 참고> 솔리의 반대가 솔로(solo)다. 솔로가 이탈리아어인 것도 처음 알았다. 라온이 덕분에 솔찬히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