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이 2학년 통지표

by 심지훈

라온이가 겨울방학에 들었다. 어제 점심땐 둘이서 초밥을 먹었다. 자전거를 타고 초밥집엘 갔다. 여름방학 들 때도 갔던 초밥집이다. 2학년 마친 것을 축하하고, 겨울방학 계획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3학년 시작 전에 했으면 하는 3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 겨울방학부터는 “자유시간”은 “유튜브시간”이 아닌 “독서시간”으로 바꾼다. 둘째 아빠와 첫 번째 주유팔로(周遊八路‧민생체험‧세상구경을 이르는 동학 용어)를 한다. 셋째 3학년 교과서를 리뷰한다.


11월에 라온이가 독감에 걸렸다. 그때부터 무한 자유시간이 주어져 유튜브를 맘껏 봤다. 그땐 아내가 바빠 라온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라온이는 이때다 싶어 실컷 유튜브를 봤다. 아이들도 눈치가 빤하다. 아빠는 뭐든 오케이하고, 엄마는 자꾸만 시킨다는 걸 안다.


아빠는 엄마와 아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라온이 편이다. “그래 라온아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라.” 라온이 덕(?)에 바론이도 유튜브를 무진장 봤다. 형제가 이럴 땐 찰떡궁합이다. ‘흔한형제’다.


어제 라온이에게 물었다. “라온아 너가 3~6학년 동안 매일 유튜브를 2시간씩 보는 게 너한테 좋을 것 같니, 나쁠 것 같니?” “나쁠 것 같아.” “그래, 그건 너도 알지.” “응.” “자, 그럼. 아빠가 세 가지를 이야기할게.”


그리 라온이는 위 세 가지를 가만 들었다. “알겠다”고 일단 수긍하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오늘부터 유튜브는 못 보는 거야?” “얘 봐라. 라온아, 아빠가 그리 팍팍한 사람이니. 금토일은 신나게 노는 거지. 그리고 먼저 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유튜브, 만화책을 보자는 거지. 유튜브 시간은 언제나 충분할 거야.” “그럼 월요일부터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럼.” “근데 내가 책을 읽는데 바론이가 유튜브를 보면 어떡해?” “그건 신경 쓰지 마. 너와 아빠가 만날 책을 보면 바론이도 책을 보겠다고 할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면 돼.” “응.”


“자, 그럼 앞으로 자유시간은 뭐다?” “독서시간.” “응. 자유시간은 독서시간이고, 만화책시간, 유튜브시간이 따로 있는 거야. 너 때 독서시간은 30분이 좋다는데, 일단 해보자. 혼자 읽어도 좋고 아빠랑 같이 읽어도 좋고.” “응.” “그다음 아빠랑 겨울방학 때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지?” “응.” “재밌을 거 같아?” “응!” “좋아.” “그다음 아빠가 3학년 교과서를 구했잖아. 아빠랑 한번 훑어보는 거야. 3학년이 되면 사회 과학 영어를 새로 배우잖아. 어떤 걸 배우는지 한번 보자고.” “응.”


저녁답에 아내가 라온이 가방에서 상장과 생활통지표가 담긴 파일을 꺼냈다. “라온아, 왜 아빠한테 안 보여줬어? 아빠가 궁금해할 텐데.” “오늘은 바빴어. 초밥 먹고 와서 과일가게 가서 주문한 거 찾고 그리고 곧장 도장 갔거든. 나도 오늘은 가방 열어볼 생각은 못 했네.” “딱 선생님이 하신 말씀대로구만. 첫 문장이 모범학생이다네.”


방학 하루 전 아내가 담임선생한테 감사문자를 넣었던 모양이다. 그에 온 답이 “라온이는 착하고 모범학생이지요”였단다. 1학기 통지표에는 없던 상세평가가 나왔다. 1학년에 이어 2학년 때도 ‘라온이는 담임 복이 있다’고 느꼈다. 베테랑 선생 중에도 인품이 훌륭한 선생을 연달아 만난 것이다. 상세평가는 3개항. 창의적체험활동상황, 교과학습발달상황,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이중 두 번째 항목 첫 문장이 눈길을 잡았다.


“국어: 누가 누가 잠자나 시를 낭송하며 시의 내용과 느낌을 떠올리고 시에 나오는 낱말을 정확하게 발음함. 이야기 속 인물의 경험과 자기 경험을 정리하고 비교하며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함. 고운 말로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다양한 상황에서 고운 말로 대화하는 능력을 길러 공동체 역량을 기름.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칭찬이나 조언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고 적절히 반응하며 대화하는 태도가 돋보임.”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었다.


“어떤 일을 해결할 때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며 귀담아들으며 자신의 주장을 할 줄 앎.”


역시 ‘우리 라온이답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 저녁을 먹으며 그 전날 밤 라온이가 보인 행동을 이야기한 일이 있다. 수학 단원평가를 풀었는데 4개를 틀렸다며 한참 동안 속상해했다. 하룻밤 지나고 저녁을 먹으며 라온이에게 ‘자기 위치’에 대해 들려주었다.


“라온아, 사람은 애나 어른이나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몰라 괜히 속상해하고 위축되는 경우가 많아. 라온이가 어젯밤에 시험문제 4개 틀렸다고 무척 속상해했잖아. 아빠는 라온이를 보면서 ‘우리 라온이가 스스로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어. 실제 너는 그런 나이이기도 하고. 근데 아빠가 너를 잘 알잖아. 봐봐. 4개를 틀렸으면 80점이야. 그럼 잘한 거야. 사람은 전체를 보기보다 위를 보기 마련이거든. 근데 한 번씩 아래도 둘러 볼 줄 알아야 해. 이 세상 아이들이 모두 100점을 맞을 순 없어. 또 80점 아래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아. 그러면 잘한 거야. 무엇보다 라온이가 착각하는 게 있어. 공부는 과정이지 한 번의 결과가 아니야. 한 번의 결과일 때가 있긴 해. 그건 현재 시점에서 수능이라는 대학입학시험이야. 넌 결국 그 시험을 위해 가고 있는 건데, 이제 겨우 2학년 애가 100점 못 맞았다고 우는 건 공부가 무엇인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틀리면 속상해할 게 아니라 제대로 알면 되는 거야. 엄마도 이걸 잘 알아야 해. 엄마가 만날 틀렸다고 지적하고 틀린 걸 설명하곤 못 알아듣는다고 혼내니까 애가 100점을 맞아야 된다고 보는 거 아닌가. 아홉 살짜리가 못하는 게 어딨나. 다 잘하는 거지. 수능도 너 대학 갈 때 되면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 실은 수능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해. 꾸준히 자기 길을 갈 줄 아느냐 가 보느냐가 성공의 척도가 되는데, 그걸 알고 사는 건 서울대 나왔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


아빠의 장황한 이야기는 좀 더 이어졌다.


“라온아, 넌 너의 위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니. 예를 들어 우리집이 잘 사는 거 같니, 못 사는 거 같니?” “잘 사는 거 같아.”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장기자랑 영상 발표할 때 보니까 우리집에 제일 넓던데.” “그래, 그렇지. 그건 어떻게 안 거니?” “봐서.” “옳지. 그게 경험이란 거야.” “공부도 비교해 볼 경험치가 있어야 해. 그래야 괜히 우는 일이 없어져. 근데 너네 학교 애들은 학원을 많이 다녀. 그래서 당장 시험은 너보다 잘 보겠지. 너는 학원을 안 다니니까 걔들보다 당장에는 못할 수 있어. 그게 네가 본 경험의 전부야. 근데 라온아, 학원을 다닌다고 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학원을 못 다니고 안 다니는 친구들이 훨씬 더 많아. 그러니까 80점은 훌륭한 거야. 그리고 아빠가 보기에 학원 많이 다니는 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 걱정할 일이야. 그건 굉장히 위험하고 바보 같은 거야. 너는 아직 커야 해. 두뇌가 커야 해. 니 머리는 가장 편안하게 해줘야 잘 커. 아빠가 언제 너 유튜브 보는 거, 만화책 보는 거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니. 시간만 조절 해주지 너가 원하면 언제든 보라고 하지. 아빠는 너에게 공부로든 놀이로든 게임으로든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 니 똑똑한 머리가 5학년 때까지 잘 크도록 도울 뿐이야. 근데 어쩌겠냐. 엄마가 일찍 공부를 시작했으니. 다만 이왕 시작한 거 매일 1쪽씩 꾸준히는 해보자는 거야. 공부는 아빠도 못 했지만, 공부는 아빠나 엄마가 해주는 게 아니야. 너가 하는 거야. 그보다 중요한 걸 한 가지 알려 줄게. 아빠는 서울대는 못 나왔지만, 서울대 나온 사람들보다 세상을 훨씬 더 잘 살아. 왜인 줄 아니. 아빠는 삶을 알거든. 삶을 알면 삶이 즐거워. 그러면 배우는 게 재미있어. 아빠는 만날 읽고 쓰고 생각하잖아. 그걸 누가 시킨다고 하겠나. 아빠가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잖아. 그러면 사람들은 아빠가 당연히 서울대 나온 줄 알아. 웃기지. 너가 커보면 알겠지만, 아빠가 너에게 줄 수 있는 한 가지 유산이 있어. 바로 삶의 태도야. 너가 커보면 알 거다. ‘우와, 우리 아빠는 진짜 삶의 고수였어’라고. 아빠와 단둘이 하는 여행은 이렇게 할 거야. 이번 겨울방학 때 한 번, 그리고 5학년 겨울방학 때 한 번. 세상을 보고 알아야 자기 자리값을 알 수 있어. 자기 분수를 알아야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갈 수 있어. 두고 보라고. 어려서부터 학원 많이 다닌 아이들은 너를 절대 따라올 수 없을 거다.”


라온이는 태생적으로, 환경적으로 큰 인물이 될 바탕을 지녔다. 라온이는 담임선생이 파악한 대로 “행동이 바르고 맡은 일을 열심히 잘해서” “책 읽기를 즐겨하고 성실히 독서해서” “친구의 의견을 존중하며 귀담아들으며 주장할 줄을 알아서” 또 다른 아비가 아니라 심보통을 아비로 두어서 큰 인물이 될 확률이 높다. 크게 키우려면 달리 크게 보여주어야 한다.

/심보통 2026.1.10.

이전 09화Christmas Piano Conc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