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자기 나이를 몇 살까지 인지하고 살까. 이 물음을 안고 산지 얼추 3년이다. 지난 주말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나는 마흔다섯 이후로는 내 나이가 가늠이 잘 안 되던데 자기는 어때?”하고 물었다. 아내는 “나도 그래”라고 답했다. “올해가 몇 번째 생일인가?” “마흔여덟 번째.” “아이쿠야, 우리도 어느새 오십줄이구나.” “응.”
사랑에 빠지면 호박도 수박으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결혼해 매일 보는 사람은 늙는지, 얼굴이 좋은지 나쁜지 헤아리기 어렵다. 앞에 것이 착시효과라면 뒤에 것은 유사 관성법칙이다. 타성에 젖으면 그게 그거다.
아내와 나는 그러나 늙었다. 늦은 서른일곱에 결혼한 동갑내기 우리는 12년을 살면서 그 세월만큼 늙었다. 아니 어쩌면 무진장 싸우느라 세월이 늙으라는 것보다 더 늙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내와 나의 ‘사랑과 전쟁’은 치열했다.
나이가 들면 늙는 대신 익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확실히 늙었다. 아내와 나는 눈가 주름이 늘었고 흰머리가 늘었고 몸무게가 늘었다. 늙으면 느는 게 또 있다. 눈치도 늘고 뻔치(뻔뻔함)도 늘고 게으름도 는다. 그러고 보면 늙음과 늚은 형제처럼 닮았다. 모양이 비슷하고 발음이 비슷하다.
물론 늙는다고 전부 늘지만은 않는다. 주는 것도 있다. 기억력, 시력, 감각, 속도, 생각 등은 확실히 준다. 주는 것 중 특별한 대목은 생각인데 나이가 든다고 생각이 유달리 깊어진다거나 썩 빼어난다거나 하는 건 허상인 걸 체감한다. 되레 생각이 점점 없어지거나 생각이 점점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앞에 것은 2년 전부터 보인 아내의 언행으로 알 수 있고, 뒤에 것은 마흔다섯부터 내 언행으로 알 수 있다.
나는 마흔다섯부터 많은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도, 물건도, 습관들도 내 기준(현재 생각)에 거슬리는 것들은 두 번 생각 않고 시원시원하게 정리해 왔다. 그러면서 신경의 탄력성이 이전에 비해 확실히 떨어졌다는 걸 느꼈다. 이제 귀찮고 성가신 건 자꾸 정리하게 된다. 좋게는 삶을 깔끔하게 단장하는 것이고 나쁘게는 삶을 좁장하게 가두는 것이다.
2.
늙은, 늙는 그래서 늘고 주는 어미아비를 둔 두 아들만이 일신우일신 중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집에서 라온이 바론이뿐이다.
늙은, 늙는 그래서 늘고 주는 아비어미는 라온이와 바론이가 뿜어대는 에너지를, 그 양기를 먹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간혹 버텨낸다.
라온이가 말한다. “아빠, 이제부터 사랑해는 떡볶이고, 튀김은 좋아해야. 아빠 떡볶이 아빠 튀김~. 아빠 떡볶이 떡볶이 튀김 튀김~.”
아빠가 말한다. “라온아 떡볶이. 라온아 튀김~. 라온아 떡볶이 떡볶이 튀김 튀김~.”
라온이가 아비 품에 꼭 안긴다. 아비는 라온이 볼을 부비고(‘비비다’가 표준어임) 쪽쪽쪽 뽀뽀한다.
옆에 있던 바론이가 말한다. “아빠 나도 나도. 떡볶이 튀김~.” 바론이는 머리 위로 하트까지 발사한다. 아빠도 머리 위로 하트를 날려준다. “바론아 떡볶이 떡볶이 튀김 튀김~.”
바론이가 아비 품에 쏙 안긴다. 아비는 바론이 볼을 부비고 쪽쪽쪽쪽 뽀뽀한다.
약속이나 한 듯 삼부자가 얼싸안는다. “떡볶이 떡볶이 튀김 튀김~.”
라온이는 태권도장을 갈 때, 바론이는 어린이집을 갈 때 “떡볶이 튀김~”과 함께 하트를 슝슝 쏘아댄다. 하트를 맞고 죽었다는 이는 아직 없다.
나는 엊그제 노안으로 새 안경을 맞췄다. 거금을 준 다초점렌즈는 멀리 보는 걸 잘 보이도록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밝게 보이도록 한다. 가까이 보이는 걸 잘 보이도록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초점을 잘 맞추어 보아야 한다. 노안으로 다초점 안경을 쓰면 세상은 밝아지는데 먼 것이거나 가까운 것이거나 초점은 흐려진다. 노안이 되면 시력이 좋다 나쁘다는 개념이 사라진다. 그저 밝게 보는 것에 족해야 한다.
다초점 안경을 찾아온 날 저녁, 나는 새 세상을 만났다. 정말 세상이 밝게, 환히 보였다. 세상이 환해지니 느닷없이 아내까지 예뻐 보였다. 밝은 세상은 이다지도 예쁜 것인가 싶어 신통방통했다.
늙음은 늚과 줆만 주는 게 아니라 라온이 바론이만큼의 밝음도 준다는 걸 알았다. 조물주께 경의를 표하는 요즘이다. 떡볶이 튀김도 감사하다. 있음으로 해서 웃음꽃 만발했으니 우리집엔 새봄이 성큼 먼저 왔다. 웃음꽃이 봄의 전령이라.
/심보통 2026.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