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전 글방 궁고재(窮考齋) 창밖 구경은 제법 쏠쏠하다. 장맛비가 더해 메타세쿼이아 숲이 더욱 울울창창한 것인데, 빗방울 몽롱하게 맺힌 창 너머에 선 놈들 중 제일 큰 것은 우리집을 기준하면 아파트 7층 중턱을 넘었고, 맞은편 대전삼천중학교를 기준하면 5층짜리 교사 지붕 꼭대기를 넘어섰다. 반대로 제일 작은 놈을 기준하면 제일 큰 놈보다는 1m정도 작은 것이, 20여 그루 빽빽한 메타세쿼이아끼리를 잰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일 수도 있다.
그걸 감안하고도 둥글게 한자리씩 자리 잡고 선 이놈들을 감상하노라면 높이도, 굵기도, 생긴 꼴도 제 각각인 것이 저것들도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한가한 궁금증은 아닌 것이, 저 생명들이나 생명들 중 가장 고등하다는 인간의 숨이나 각기 타고난 것이 다른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박원순 시장의 숨이나 백선엽 장군의 숨이나 저기 저 뭇 생명들의 숨이나 저마다의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루 시차를 두고 운명을 달리한 박원순, 백선엽 이 두 사람의 사망으로 대한민국이 둘로 쪼개졌다는 분석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저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땅에선 과거의 영웅 동상이 처박히고 끌려 내려오는 수난사가 연일 이어진다며 “역사는 현대문학이란 말이 있다”는 말로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역사가 미국 땅에서 써지고 있다는 기사도 봤다. 불가(佛家)에선 뜨겁게 맞붙기를 좋아하는 귀신을 아수라라고 하고, 그런 아수라가 펼치는 투쟁 현장을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오늘이나 저 먼 미국의 오늘이나 아수라장이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뜨거울 계제가 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미 아수라장인 현상이 있은 바 이쪽이 옳고, 저쪽이 그르다고 비정하고 드는 것이 또 다른 분란일 수 있음만은 잘 알겠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박원순의 경우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전근대의 음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수도 서울의 수령(守令)이었기로 그가 어떻게 명을 달리했든 고인에 대한 예우는 그 예우대로 해주어야 한다고 집권 세력은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시민들은 전근대의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은 까닭에 자그마치 50만 명이 단숨에 벌떼처럼 국민청원의 장으로 몰려든 것이 아니겠는가.
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백선엽의 경우는 미국에서 요즘 일어나고 있는 과거 영웅 지우기와 닮았다. 미국 7대 대통령을 지낸 앤드루 잭슨은 요즘 때아닌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는 과거 영국과의 전쟁에서 영웅으로 칭송됐다. 그러나 최근 미시시피주 주도인 잭슨시는 다운타운에 있는 그의 동상을 외곽으로 치우기로 했다. 백악관 앞 동상에는 시위대가 몰려들어 철거를 시도했다. 과거 흑인 노예를 소유한 것이 문제가 됐다. 백선엽 장군은 반세기 넘게 한국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전력 때문에 말년에 친일 시비에 휘말렸다.
박원순의 풍파도 운명이요, 백선엽의 풍파도 운명인 것은 또 하나의 운명인 유극량 장군의 경우를 살펴 헤아릴 만하다. 유극량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명장이다. 그의 경력이 유별나다면 출신이 천민이란 점이다. 당대 양반이어야 문과에, 양민이어야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저 태생적으로 가난했다고 전해지는 박원순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극적인 인생역전극을 펼친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전쟁터에서 어설픈 상관을 만나 개죽음 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병졸들과 함께 적군의 아가리로 뛰어들었다. 후에 그는 송상현, 김연광 등과 함께 삼충신 이야기 ‘승절사삼충록(1798)’의 주인공이 된다.
하나 그는 우리 역사에서 아스라한 저 먼발치에 있다. 그를 기억하는 후대의 시민도 심지어 역사학자도 잘 없다. 429년 전 임진강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후대에 우국충절의 상징이 된 유극량. 그의 유택(묘)은 임진강 인근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홍수로 뼈째로 휩쓸려 내려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노장 백선엽은 숨을 다하기 전 “나는 동작동 현충원이나 대전현충원이나 어딜 묻혀도 상관없다”고 했다. 혹자는 박원순 스타일은 시장장이 아니라 조용한 가족장을 원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살아 영웅이 되고, 어떤 이는 죽어 영웅이 되곤 한다. 어떤 이는 죽었을 그때 시끌벅적 이슈를 양산하지만 머지않아 잊혀지고, 어떤 이는 오랫동안 기억되곤 한다. 어떤 이는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살다가 가지만, 어떤 이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날 좀 내버려두라고 한다. 이래나 저래나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들의 역사쓰기는 여지없이 좌충우돌한다. 아수라 같은 치들이 연출하는 아수라장이 현대문학으로 치면 콩트요, 연극으로 치면 희극이지만 아수라들은 쉬이 알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 영웅은 없다. 만들어진 영웅만 있을 뿐이다. 궁고재 창 너머 메타세쿼이아들이 실바람에 고개 끄덕인다. 그쯤은 나도 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