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의 일들

by 심지훈

라온이 반에는 보나라는 여자애가 있다. 이 아이가 뭘 보나 했더니 우리 라온이를 본 모양이다. 아홉 생일을 하루 앞둔 라온이가 고민이 생겼다며 아빠에게 상담 신청을 했다.

“우리 라온이 고민이 뭘까? 아빠한테 얘기해 봐.”
“아빠, 보나가 나랑 결혼을 한대. 미친 거 아니야?”
“우엥? 보나가 너랑 결혼을 한다고?”
“응.”
“언제 그랬는데?”
“오늘 방과후 미술시간에.”
“너무 징그럽지 않아?”
“너한테 직접 말했어?”
“그건 아닌데.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가 2학년 2반이고 40번대고 이름 첫 글자가 심이래. 그럼 나잖아. 봐봐. 2학년 2반에 48번이고 성이 심인 아이는 나뿐이거든.”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보나가 (미술 수업을 같이 듣는) 00에게 귓속말로 나라고 했어.”
“보나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넌 뭐라고 했는데?”
“도망쳤지.”
“넌 보나가 별로야?”
“응.”
“왜?”
“보나는 나를 너무 세게 때려.”
“보나가 라온이를 좋아하나 보네. 여자애들은 좋아하면 때리거든. 흐흐흐.”
“아니야. 우리반 남자애들도 여자애들을 모두 싫어해. 너무 힘이 세다고.”
“(1학기 학급반장으로, 라온이가 늘 칭찬하던 여자아이) 채원이도 남자애들을 때려?”
“채원이는 안 때리지.”

그러니까 요약하면 보나가 2학년 1학기 동안 라온이를 지켜보다가 2학기가 시작되고 (공교롭게) 라온이 생일 하루 전날 방과후수업 미술시간에 라온이에게 깜짝 고백을 했다. 당황한 라온이는 당황해서 도망쳤다. 평소 호불호가 분명한 라온이로 봐서 보나는 라온이 스타일이 아닌 듯싶고.

라온이가 또 하나 고민이 있다고 했다.

“또 무슨 고민이 있을까?”
“내가 원래 반에서 인기가 채원이 경환이 다음으로 세 번째 많았거든. 근데 요즘은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애들이 채원이나 경환이한테 안 가고 나한테 와.”
“그래? 몇 명이나 오는데?”
“한 10명.”
“왜 오는데?”
“이야기하려고 오지.”
“무슨 얘기?”
“애들이 나보고 자꾸 잘 생겼대.”
“누가? 여자애들이?”
“아니, 남자 여자 모두 나보고 자꾸만 잘 생겼대.”
“그래? 넌 근데 잘 생겼잖아.”
“글치.”
“그게 고민이야?”
“애들이 너무 많이 오니까 부담스럽지.”

그러니까 요약하면 라온이에게 잘 생겼다고 하는 친구들이 라온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부담스럽다는 뜻이렸다.

퇴근한 아내에게 라온이의 요즘 고민을 들려주니, 쿵짝이 잘 맞는다.

“그렇지. 우리 라온이 정도면 여자애들이 탐낼만 하지. 잘 생겼지, 마음씨 착하지, 그럼!”

아홉 생일을 맞은 라온이는 오늘 이른 아침 흰색 헤드셋을 선물로 받았다. 엄마와 상의해서 직접 고른 헤드셋을 끼고 아침부터 ‘5분 영어문장 듣기’를 했다.

간밤 나는 평소 잘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 서양에선 꿈은 불안심리의 결과라는데, 동양의 정서로는 꿈은 갖은 해몽을 낳는다. 간밤 큰 지네 한 마리가 또렷하게 나왔다. 끔찍해서 눈을 떴더니 새벽 4시. 하도 또렷해서 동양인답게 해몽을 찾아봤다. 3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길몽. 금전적으로 좋을 수.
흉몽. 공직자라면 고전할 수.

또렷한 큰 지네 한 마리. 아마도 지난 주말 산림청이 개관한 금산의 자연휴양림을 갔다가 두꺼비같이 커다란 힘 좋은 개구리며, 여치 떼며, 새끼 지네며, 각종 곤충을 만난 후유증이 아닐까 싶었다. 아내도, 아이들도 기겁을 했더랬다.

내게 돈이 들어올 수가 있나. 확률이 대단히 적다. 공직자라면 고전할 수. 이 대목이 걸린다. 스토리텔링 과업이 들어온 중에 집사람이 바빠 이중고가 될 수도 있다.

이 정부 들어 통계청이 35년 만에 내부 청장을 냈다. 지난 주말엔 국가데이터처 승격을 발표했다.

어제 아내 이야기를 듣자니 관련 법은 추석 전에 통과될 터이니, 10월 1일부터 처 운영에 들어가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큰 지네 꿈은 아마도 아내의 앞날을 예고한 꿈인 동시에 내 앞날을 예고한 꿈일지도 모른다.

라온이가 태어난 날은 9월 9일(2017년)로, 이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선 날(1948년)이고, 북한이 5차 핵실험을 감행한 날(2016년)이기도 하다.

또 조선방송협회가 ‘KBS’로 명칭이 변경된 날(1945년)이고, 배우 강수연 씨가 <씨받이>로 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날(1987년)이고, 제주불교방송이 개국한 날(2018년)이다.

9월 9일에 태어난 이로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년), 당대 양심 있는 종교인이면서 ‘5공 부역자’란 옥에 티를 가진 지학순 주교(1921~1993년) 등이 있다.
*지학순 주교는 1980년 5공화국 대통령직속 국정자문위원직을 수락하면서 ‘5공 변절 윤‧천‧지‧강’ 중 한 명으로 지목, 비난을 받았다. 윤‧천‧지‧강은 윤보선(4대 대통령), 강원룡(목사), 천관우(언론인), 지학순을 말한다. 전두환 정부는 5공 비판 세력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존경받는 원로들을 들러리로 내세워 정권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뒷날 강원룡은 자서전 <빈들에서>에서 국정자문위원 참여를 “김대중 구명과 기독교방송 광고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맞바꾼 것”이라고 회고했다. 천관우는 측근들에게 국정자문위원 참여를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전한다.

한편 독일의 생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860~1788년),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수석 마오쩌둥(1976~1893년) 등은 9월 9일에 하늘의 별이 된 이들이다.

아홉 라온이의 또 다른 요즘 고민 중 하나는 서울대를 갈까, 카이스트를 갈까이다.

“아빠, 서울대는 서울에 있잖아. 그러면 돈이 많이 들잖아. 고민되네.”
“라온아, 미국에 하버드도 있어.”
“하버드? 거기가 서울대보다 좋아?”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지.”
“그래?”

나는 라온이가 ‘자기만의 역사(=자등명‧自燈明)’를 쓸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홉 인생에 또 아홉이 축적되면 라온이의 역사는 대충 색으로 분별 될 터이다. 유순한 중에 호불호를 분명히 드러내는 라온이의 성향처럼, 화이부동 중에 자기만의 분명한 색을 가진 청소년이 되기를, 청년이 되기를, 어른이 되기를, 라온이 아홉돌 앞에 아빠 마음(법등명‧法燈明) 놓는다.

“라온아, 사람과 사건이 나고 지는 흐름과 기운 속에 새로 나고 새로 지는 사람과 사건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란다. 이 흐름과 기운을 잘 느끼며 살아야 지치지 않고 굳세게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단다.”
/심보통 2025.9.9.

keyword
이전 09화아홉돌 맞는 첫돌 그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