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여름 이야기-엄마랑 조개잡이
03. 여름 이야기
(엄마랑 조개잡이)
해가 이미 중천인데 아직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뒹굴뒹굴 늘어지도록 늦잠을 자도 괜찮은 나른한 휴일이다. 아침 햇살이 빛바랜 창호지를 뚫고는 얼굴까지 가 닿는다. 눈이 부신 아이가 이마를 찡그리더니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여느 때처럼 떠들썩해야 할 집이 너무도 조용하다. 동생들은 이른 시각부터 친구를 찾아 나섰나 보다. 태양의 집요한 방해로 마지못해 눈을 뜬다. 마루에 덩그러니 차려진 밥상이 보인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강변 쪽으로 내어진 길을 분홍색 자전거로 달린다. 페달을 빠르게 밟아 강바람을 가른다. 아이의 위압적인 기세에 더위가 잠시 주춤한다. 길 양옆으로 부모님의 땀방울을 가득 머금은 벼가 무럭무럭 자란다. 논바닥 가까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벼가 내뿜는 열기로 후끈하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한가로이 떠 있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로 엄마가 일손을 놓았다.
“엄마랑 강변에 가자.”
“응!”
심심하던 차에 엄마 마음이 바뀔까 부리나케 따라나선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금강물은 연한 초록빛을 띠는데 에메랄드를 연상케 한다. 갈대숲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니 물이 빠진 금강이 감추었던 모래사장을 드러낸다. 그 밑으로 출렁이는 물은 모래알이 보일 만큼 투명하다. 썰물이면 드러나는 모래밭에 살짝 모습을 감추고 있는 노란 얼룩무늬의 조개다. 엄마 따라 열심히 줍다 보니 슬슬 꾀가 난다. 아이는 일부러 물 위로 엎어졌다. 미지근한 물 온도에 오히려 기분이 좋다.
“엄마, 어떡해? 옷이 다 젖었어.”
힐끔 뒤돌아본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아이가 때는 이때다 하고는 물장구를 치며 신이 났다. 마을 저수지에서의 물놀이와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잔모래가 끼어든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의 짓궂은 장난에 발가락을 자꾸만 꼼지락거린다. 물이 유난히 초록빛을 띠는데 비가 내린 뒤여서 평소보다 깨끗하다.
(사진:금강 갈대밭)
“그만 가자.”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점심 먹어야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소나기다. 너른 들에는 비를 피할 곳 하나 없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엄마까지 흠뻑 젖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가 부지런히 우물물을 퍼 올린다. 큰 함지박에 조개가 가득 찼다. 장독대에서 푼 굵은소금을 뿌리고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휘휘 젓는다. 빛깔이 더욱 선명해진 조개가 슬그머니 하얀 속살을 내보인다.
큰 솥에 조개를 옮겨 담는다. 화들짝 놀란 조개가 재빨리 문을 닫고 각자 집으로 꽁꽁 몸을 숨긴다. 엄마가 마당에 솥을 내 걸고 불을 지핀다.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꽉 다물었던 입을 더는 참지 못하는 조개다. 입을 빼꼼히 벌리더니 급기야 쩍 하고 벌린다. 뜨거워진 솥 안에서 조개들이 아우성을 치고 솥뚜껑도 덩달아 떨거덩거린다.
솥을 열자 뚜껑을 밀어 올리던 수증기가 훅하고 밖으로 피어오른다. 이내 잠잠해진 조개를 뽀얗게 우려낸 국물과 함께 한가득 담아낸다. 파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먹음직스러운 조개가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다. 후후 불며 조심스레 맛을 보는데 짭조름하고 쫄깃한 식감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날쌘 놈들로 살아 있었는데 이제는 아이의 입 속에 있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