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구매하신 차량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네, 금방 내려가요.”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니 오늘이 새 차를 받기로 한 날이란다. 말쑥한 차림의 남자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마침 눈에 띄는 흰색의 세련된 지프차가 있다.
“이건가요?”
“아니요. 저쪽입니다.”
영업사원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거만한 자태로 위용을 뽐내는 낯선 모양의 커다란 자동차다.
“아니 저 차라고요? 저 큰 차요?”
“네, 맞습니다.”
트럭도 아닌 것이 분명 앞쪽에서 보면 지프차가 맞는데 뒤까지가 1t 화물차보다 넓고 길다. 그간 눈여겨보았던 ‘칸’과는 영 다른 느낌이다. 차 키를 넘겨준 그가 당황한 고객을 뒤로 총총히 사라진다.
우리 부부는 차량 구매에 있어서 안전성과 내구성을 제일로 여긴다. 안전을 고려하면 차는 무조건 커야 했다. 2002년 아들의 출생을 앞두고 기존의 소형차를 바꾸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란 은행잎 색깔의 마티즈가 곧 새 주인을 찾아 떠났고, 렉스턴은 씩씩하게 먼 길을 달려 그렇게 찾아왔다.
집도 없이 젊음과 패기만 있던 신혼부부는 당시 살던 아파트 매매가와 비슷한 차량을 선택했다. ‘대한민국 1% 차’라며 선전을 해대던 차를 겁도 없이 샀다. 신입사원인 남편은 상사보다 더 좋은 차량을 끌고 다닌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며 투덜댔다.
그런데 최근 1년 전부터 하나씩 잔 고장이 생기며 정비소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차체가 분리되어 부분 용접을 하더니 이젠 시동까지 걸리지 않아 말썽이다. 남들이 여러 번 차를 바꿀 때도 꿋꿋이 의리를 지켰다. 하지만 노후화된 경유차인 까닭에 마침내 조기 폐차를 신청했다.
“출장 나갔다가 한참을 고생했어.”
“날이 추워서 그랬나 봐요. 난감했겠다.”
“아쉽지만 보내야 할 때가 되었나 봐.”
아들의 출생, 그리고 그 아들과 전국을 누비며 쌓은 추억 속에는 언제나 렉스턴이 함께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직도 멀쩡하다. 그렇지만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지내는 남편의 이동 거리를 생각하면 바꿔야 한다. 처음엔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번엔 남편을 위해서 결심이 필요하다.
“렉스턴을 폐차합니다.”
“여태 무사고로 우릴 지켜줬는데.”
이미 주차장에는 투박해 보이는 ‘칸’이 떡하니 쳐들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선택한 차량이다. 낯선 첫 대면에 차량 내부를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실제를 보지 못한 남편도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난다.
“이걸 어떻게 운전하고 주차해요?”
“그렇게 커요?”
“렉스턴과 비교하면 조금 더 길 뿐일 텐데.”
주차장에 미리 자리를 차지한 얄미운 녀석!
설 자리를 양보하고 추억으로 남아야 할 우리 친구!
듬직해 마음을 편안케 해 주던 친구!
끝까지 버티다가 급기야 멈추어버린 너!
이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고 어찌 보낼지 마음이 어지럽다. 렉스턴을 보자니 우리의 인생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음에 서글픈 생각이 든다. 없던 병이 생기고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는다. 정수리에는 새치가 하나씩 삐죽삐죽 솟기 시작한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가 들고, 아들은 칸처럼 상남자가 되어가겠지. 금요일 오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퇴하고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벌써요?”
“폐차하러 가야 해요.”
“서운해서 어떡해요?”
“가기 싫은지 시동 걸기까지 힘들었어요.”
“어휴, 같이 가려고 했는데 어째요.”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내줘요.”
한참 뒤 남편이 보낸 영상을 보고는 울컥한다. 폐차장 입구에 세워진 렉스턴은 처연한 모습으로 담담히 서 있다.
“녀석, 에고!”
“덜덜덜”
“고생했다.”
“덜덜덜 덜덜”
폐차장 안에 울려 퍼지는 무거운 엔진 소리다. 무섭다고 보내지 말라는 슬픈 애원처럼 들린다. 영상 속에는 오래된 친구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남편의 안타까운 음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18년을 함께 했으니 더욱 애틋한 심정임을 짐작한다. 무자비한 폐차장에 홀로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월요일에 폐차가 진행된다는데, 그새 네가 그립구나. 직접 보내며 말을 해야 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