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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tain가얏고 May 29. 2024

쉬어가는 청산도(기행문)


  평생 일만 하던 아버지의 허리가 그대로 굽었다. 똑바로 서기 힘들고 오히려 땅을 보기 편하다는 아버지의 척추가 여행지에서는 멀쩡히 펴진다니 희한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 선택한 곳은 전라남도 완도군 소재의 청산도, 땅끝마을 해남을 지나고 완도에서도 배로 50분을 더 달려야 닿을 수 있다. 

    

 막상 부천에서 출발하려니 먼 여정에 한숨이 절로 난다. 휴가철 교통 체증을 피해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쉼 없이 운전하여 군산에 도착했다. 먼저 출발한 아버지는 섬에서 기다리고, 형편상 함께하지 못해 늦어진 어머니가 집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드디어 일행으로 합류한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니 해가 이미 중천이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 예기치 못한 일로 하루가 줄어 마음이 급하다. 신분증을 깜박한 어머니로 인한 약간의 해프닝도 있었으나 완도항에서 무사히 10시 배에 올랐다.   

   

 우리가 탄 배는 ‘퀸 청산호’라는 이름의 1000톤급 선박이다. 2016년 5월부터 평일에는 8회, 주말은 15회 왕복 운항한다. 피서객이 몰리는 한여름이나 명절에는 최대 782명까지 승선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청산도의 유명세를 확인할 수 있음이다. 배 안에 수십 대의 승용차가 탑재되어 있음에 어머니가 놀라워한다. 

     

 차량을 주차하고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선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풀어놓는 승객들로 다소 소란스럽다. 긴장이 풀린 어머니가 의자에 앉더니 금세 졸기 시작한다. 에어컨 앞에서 더위를 식히고 갑판으로 나왔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고속으로 달리는데, 나아감에 거침이 없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근심을 털어내니 가슴 속까지 후련하고 상쾌하다. 섬에 가까워지자 청산호는 우렁찬 뱃고동 소리로 여행객들의 도착을 알린다. 일상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듯 줄지어 내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인파를 빠져나오니 숙소를 찾아가는 길가는 한산한데 푸른 바다와 맞선 아담한 돌담이 정겹게 맞아 준다.


 숙소로 예약한 ‘느린 섬 여행학교’는 2009년 폐교가 된 학교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해가 빨리 지는 섬 특성상 서둘러 짐을 풀고 해수욕을 즐기러 나갔다. 날이 저물면서 태양의 기세는 한풀 꺾였으나 한낮의 열기는 여전하다. 숙소에서 가까운 ‘신흥마을’ 해변은 썰물 때여서 물가까지 거리가 한참 멀다. 여러 곳의 해수욕장을 미리 물색해 놓았던 남편이 ‘진산리’ 갯돌해변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진산리는 모래사장이 아닌 예쁜 조약돌이 장관인 해변이다. 그늘을 찾은 부모님과 물속에 발만 담근 나, 튜브를 타고 깔깔대는 동생……. 성격처럼 더위를 피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이 평화롭다.   

  


 잠시 후 해변 위 도로에 자리한 마을회관 앞에는 작은 트럭이 도착해 깜짝 시장이 열렸다. 흥정하는 아낙과 대꾸하는 장사치의 말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웃음 가득한 얼굴에는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넘친다. 흥미롭게 구경하던 어머니도 무언가를 사고 싶은 눈치다. 관광버스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내린다. 청산도가 주는 느긋함 때문인지 산책을 즐기는 관광객의 인상마저 편안하고 너그럽다. 인생을 살면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도 불교에서는 억겁의 ‘연’이라고 한다. 문득 피천득의 수필 중 ‘인연’에서의 글귀가 생각났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분위기에 취해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시금 쳐다보게 된다.   

   

 언덕길을 오르니 새로운 정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기대했던 멋진 보리밭은 추수가 끝나 볼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다랭이논’으로도 불리는 계단식 ‘구들장논’은 푸릇푸릇한 청보리가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의 운치가 있다. 물을 가둔 후 구멍을 통해 아래로 흘려보내는 방식이 구들장과 닮았다 하여 ‘구들장논’이라 한다는데, 물이 귀한 섬에서 선조들 생활의 지혜가 돋보이는 독특한 농법이다. 


 2011년 국제 슬로시티연맹에서 세계 슬로길 1호로 공식 인증했다는 청산도 ‘슬로길’은 둘레길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지만 불볕더위 속에 걷기를 포기하고 차량 드라이브를 택했다. 그런데 영화 ‘서편제’ 촬영지 팻말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내렸다. 화면에서 보던 길을 실제로 걸으니 굳이 이곳까지 와야 했던 감독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굴곡진 주인공의 인생이 구불구불 당리 언덕길과 닮았다. 미역 줄기처럼 이어지던 ‘슬로길’ 때문인지 어머니가 청산 농협에 진열된 미역을 전부 사들일 기세다. 참석하지 못한 가족 모두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쇼핑을 마친 어머니는 그제야 만족한 모양이다. 


 이튿날 도란도란 부모님의 이야기 소리에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섬은 밤새워 열기를 다독인 탓에 활동하기에 적당한 온도가 되었다. 숙소를 나와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한적하고 조용한 ‘권덕리’ 포구에 다다랐다. 방파제에서 마주친 마을 주민이 반가운 인사로 맞이한다. 권덕리 방파제는 낚시꾼들에게 더 잘 알려진 곳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고 지나간다. 이른 아침의 쾌적함이 더해진 덕인지 진산리와 비교하면 물이 한층 맑고 깨끗해 보인다. 이곳에서는 여행객도 전복이나 소라 같은 해산물 채취가 가능하다. 사위 따라 낚시가 취미가 된 아버지가 방파제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침 우럭을 낚아 올리는 장면에서는 두 남자가 홀린 듯 부러운 눈초리다. 어머니는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몇 해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회상한다. 부모를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은 물결과 함께 출렁이고, 흐르는 눈물에는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난다. 


 슬로 시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청산도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숙소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한다. 하지만 섬의 매력에 빠진 남편은 바로 배를 타기는커녕 근처의 ‘지리 해수욕장’으로 차를 몬다. 역시 ‘슬로길’이 지나는 청산도의 아름다운 해변이다. 해송 숲이 어우러진 해변의 그늘마다 여러 채의 텐트들이 알록달록 자리를 잡았다. 물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남편은 어느새 수영복 차림이다. 느림이 곁들여진 슬로 시티에서는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소소한 일상들이 오히려 여행을 풍요롭게 만든다. 청산도에서의 8월을 추억으로 남기고 여유롭게 선착장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출항 시간이 임박했는지 기다리는 줄이 없다. 일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부리나케 뛴다. 여유롭게 다음 배를 타도되는데 뭍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습관처럼 급해진다. 


 청산도는 마을을 잇는 길 이름 역시 슬로길, 느림의 미학이 돋보이는 섬이다. 삶에 지쳐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손짓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부모님의 인생에도 쉼표가 필요함을 느낀다. 집 밖을 나서기만 해도 좋다는 어머니에게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같은 시간대 같은 코스의 여행이지만 저마다의 마음에 무엇을 남겼는지 궁금하다. 점점 배와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사진 속 가족들의 환한 미소를 보며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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