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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 Jun 05. 2022

[시를소개합니다] 01. 소행성 - 신철규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우연히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이 시를 읽고, 한동안 생각이 나서 결국 서점에 찾아가 한 권을 사와야 했다. 


지구 반대편에 출장을 간 누군가를 생각하며 읽다보니 처음에는 꽤 로맨틱한 시라고만 느꼈는데, 갑자기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죄책감이 사라질까, 라는 구절에서부터 뭔가 싶어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낭독회에서 시인이 직접 설명한 내용이 있었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를 여는 첫 시로 어린왕자를 기본 모티브로 삼고 있다. 신철규 시인은 “어린왕자는 혼자 사니까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둘이 살며 생기는 오해가, 혼자일 때에는 생기지 않기 때문. 신철규 시인은 “부부 생활을 해본 분은 알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증오할 때도 있다” 며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과정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 이야기했다.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이 기사를 읽고 부부싸움 후에 뾰족한 입술로 책상에 앉아 혼자 사는 어린왕자가 부럽다고, 이 시를 적어 내려갔을 시인을 떠올리고 잠깐 소리내어 웃었던 것 같다. 하하.


친한 친구랑 같이 여행을 갔다가 까딱 잘못하면 틀어져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신혼부부는 필연적으로 끊임없는 다툼이 있는 건 그 관계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힘든 일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못 견뎌하면서도 상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안심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징글징글한 사랑을 어린왕자의 소행성으로 연결시킨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 그리고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는 섬세함,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는 참신한 표현까지, 재밌게 읽다 여운이 남아 몇번이나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독특한 소재, 참신한 제목의 시가 많았다. 프롬프터, 밤의 드라큘라, 해변의 진혼곡, 데칼코마니, 외곽으로 가는 택시 등.


최근에 정치적으로 인용된 시인이기에 첫 글로 추천하기 조금은 조심스러웠지만,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읽다보면 어린아이같은 시각과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소개해본다. 


신철규 시인은 2011년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울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쓴 그의 시가 궁금하다면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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