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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 Aug 21. 2023

[시를 소개합니다]04. 피로와 파도와 - 이제니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라고 쓴다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한적한 한담의 한담 없는 밀물 속에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있다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라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백 번 적는다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中




왜 시냐고 묻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시가 될 수 있어서, 그리고 감각이 중첩되는 지점이 좋아서라고 답했던 것 같다. 한 시인은 본인의 에세이에 시는 소리내 읽는 문학이라며, 이 시를 소개했다.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라는 책을 추천한다.)


내가 이 시를 읽으면 보이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은 한 발 한 발 파도치는 해변을 걷는 여행자의 발이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를 읽다보면, 피로한 발을 다시 파도가 밀려와 씻어주고, 또 한 발을 내딛는 발자국의 긴긴 여정이, 그리고 물결을 따라 자꾸만 멀어지는 바다가 내 눈에 보이곤 한다. 


그러다 보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염없이 적어내는 것만 같고, 또 그렇게 못다한 말들을 적어내는 마음으로 끝없이 떠도는 것만 같다.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라고 쓴다/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를 읽다보면 그러하다. 바다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혼자 글을 적어내려가는 이의 마음처럼 파도가 밀려오는 것도 같다. 


나는 자꾸 바닷가에 살면서 또 바닷가로 떠났다. 죽은 사람처럼 모로 누워 있어도 가시지 않는 피로 위로 파도가 오가는 기분으로 매일의 일기를 쓴다. 


줄글로 적지 못할 심정을 시로 써내는 마음을, 못다 전한 안부를 편지로 적는 마음을, 적어내도 그저 백지를 낭비하는 연약한 마음일 뿐이다. 


이런 감상적인 글을 적는 걸 보면 내가 새벽 2시에 맥주 한 캔에 취한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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