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서른 하루 < 협재해변 >

by 준환

협재해변


제주의 농사는 일 년 내내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매일 이른 아침부터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 심어진 옥수수는 사람 키만큼 자랐다. 이 주 전쯤은 트랙터로 일군 밭에 붉은 양배추 모종이 자리 잡았다. 집 근처 텃밭에 같은 걸 조금 심어두어 지날 때마다 어떨지 궁금했다. 얼마 전 마늘 수확이 끝났고, 누렇게 익은 보리는 오월이 끝나 감을 알리고 있었다. 이틀 후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숙소에는 고양이가 많다. 다 큰 일곱 마리는 샴, 치즈탭, 얼룩으로 종류도 다양하다. 태어난 지 한 달 안 된 새끼는 여섯 마리였다. 다만 지금은 네 마리만 남았다. 여기 고양이들은 반려동물이 아니다. 주인집 할머니가 주는 사료에 갈 데 없는 한 마리, 두 마리가 모여 대가족이 되었다. 잠시 놀러 온 아이들은 개성 있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제주도 고유 성씨 ‘고’자를 붙인 고동동, 고솜이, 고나비 등이 제법 어울린다. (이건 내 해석으로 사실 고양이 ‘고’자 땄다)


고양이들 생활은 자유로웠다. 잔디밭과 돌담에서 한참 장난치며 뛰놀다가 졸릴 때면 나무 아래나 조용한 양지바른 곳으로 갔다. 한동안 외유하다 돌아와 맡겨두었던 양 간식 달라고 조르는 것들도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들은 할머니의 따듯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무집 보금자리에서 매일 새로운 걸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솜씨 좋은 할아버지는 집 주변을 낮은 철망에서 높은 나무 울타리로 바꾸어 주셨다. 밖으로 탈출하려는 호기심 왕성한 아기들을 위한 배려였다. 비록 두 마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과 이별하긴 했으나 남은 애들은 건강하다.


주인 할아버지는 제주 생활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다고 했다. 척박한 환경과 배타적인 인심 때문이었다. 이십 년 전 IMF로 도피하듯 와 어려운 때를 견뎠고, 지금은 큰 불편함이 없으나 친구 없는 외로움이 가장 크다고 한다. 대작할 사람이 없어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술을 끊고, 대신 한동안 피우지 않던 담배를 선택했다. 아마 연기와 함께 그리움을 날리려는 마음이 아닐까.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나에게도 퇴직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라고 권했다. 사십 대 중반 시점에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어제만큼 날씨가 좋다. 바람은 다소 차갑지만, 강한 햇살로 아침부터 협재해변에 있었다. 투명한 바닷물 속 모래가 파도 흐름에 맞춰 떠올랐다가 가라앉으며 물결 자국을 남겼다. 팔다리를 한껏 뻗어 뒤로 눕고는 첨벙거리며 해안선을 따라갔다. 튜브에 앉은 아이를 한참 끌어주다가 바람에 살짝 추위가 느껴질 때는 빌린 텐트에 쉬어 모래찜질했다. 앉은 김에 먹은 치킨 한 마리. 제주 바다에 와서 가장 따뜻하고 길게 보낸 시간이었다.



토요일 연재
이전 27화33일 제주 협재 일기 그믐 < 애플망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