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그믐 < 애플망고 >

by 준환

한림 오일장 – 궷물오름 – 곽지해변 – 금성포구


아이는 제주 애플망고에 푹 빠졌다. 여행 오기 전 지인에게서 받은 선물은 크고 먹음직스러웠다. 한 조각 맛보더니 받아온 두 덩이를 혼자 다 먹어 치웠다. 그 후 매일 그리워하다 제주 온 첫날 마트에서 다시 만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너무 비싼 가격에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둘째 날 다시 마주쳤을 때 역시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두 번은 피하기 어려웠다. 아이의 울음은 곧 아내의 분노로 번졌고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여행 초반 분위기는 차갑게 얼었다. 한 끼 식사 가격일뿐인데 너무 자린고비처럼 굴었나…(사실 아이가 원하는 데로 들어주면 버릇을 망칠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면 어릴 적 원하는 걸 얻어 본 적 없는 탓에 떼 부리는 아이 행동에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우는 애를 진열대로 데려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결국 한 팩을 샀고 그 후로도 성화는 끊이지 않았다.


한림 오일장은 농산물 직거래로 가격이 비교적 싸다. 오늘은 이십사일, 마침 또 장이 섰다. 정돈된 과일가게에는 주인이 직접 기른 애플망고가 잘 익은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대체로 맛은 비슷해 색깔이 좋거나 매끈한 모양보다는 큰 것만을 골라 담았다. 마지막 오일장의 선물이다.


아이는 산딸기도 좋아한다. 따라비오름에서 얻은 즐거움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따는 재미와 달콤한 맛을 찾아 오름으로 갔다. 한림과 애월에서 가장 큰 건 큰녹고메다. 하지만 올라가는 시간이 길어 가까이 있는 족은녹고메로 향했다. 찻길에서 소로로 접어들어 포장도로에서 비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절반 정도 삼사 킬로미터를 간신히 이동했으나 길은 점점 좁아졌고 심하게 울퉁불퉁했다. 끝까지 가려다가 ‘쿵, 쿵’ 낮은 차체 바닥이 긁히는 소리에 다시 돌아오는 게 무서워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오는 길 족은바리메오름에 잠시 내려 양지바른 숲을 따라 걸어 들어갔으나 산딸기가 보이지 않았다. 차를 타고 큰길로 나와 가까운 궷물오름으로 갔다.

※ 내비게이션에 족은녹고메를 찍은 탓에 뒤편 소로로 안내받았다. ‘궷물오름’을 입력하면 모두 편하게 갈 수 있다. 녹고메, 궷물, 족은바리메는 뒤편 비포장 소로로 입구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이리로 오는 것이 좋았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오른편은 궷물, 왼편은 족은녹고메로 이어진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아무래도 좀 더 큰 쪽이 좋을 듯해 족은녹고메 쪽으로 올랐다. 얕은 경사로를 따라 십 분쯤 들어갔을 때 풀섶에 매달린 열매가 보였다. 산딸기였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아직 익지 않은 데다 쪼그라든 게 볼품없었다. 아마 누군가 한차례 따간 다음 다시 열린 모양으로 익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소득 없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던 정자로 돌아가 함께 반대편 궷물오름으로 올랐다.


둘레길을 따라 올라간 바다 쪽 산등성에는 독특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테우리 막사. 테우리란 제주 방언으로 말과 소를 풀어놓아 먹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목동을 일컫는다. 그 테우리들의 거처를 우막집, 막사로 부른다. 담을 쌓아 올려 나뭇가지를 걸치고 그 위에 띠 풀이나 억새로 덮어 임시 거처로 만들었다. 지금은 산 가운데 외따로이 있으나 예전에는 큰 목장이었음이 짐작되었다. 짧은 오르막 정상에 잠시 앉았다가 내려가는 길섶에 기대했던 산딸기나무가 무성했다. 마찬가지로 덜 익은 열매만 달려있어 오르다 만 족은녹고메에 갈까 했으나 지친 아이를 업고 가는 건 무리였다. 노루가 쉬어갈 듯한 깊은 산속 옹달샘을 보는 걸로 만족했다. 궷물오름은 물이 고인 오름이란 뜻으로 이 두 연못에서 유래되었단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애월의 곽지해변으로 갔다. 그동안 먹던 현지 음식보다는 햄버거를 골랐다. 콜라와 감자튀김까지 이국적인 한 끼였다.


애월에는 곽금 8경이 있다. 한담해변과 곽지해수욕장에서 곽지리와 금성리 두 마을에 이르는 길에 있는 경치가 빼어나고 오랜 이야기가 깃든 곳을 말한다. 전체 약 십일 킬로미터, 걸어서 서너 시간 거리였다. 하지만 오래 걷기는 어려워 가까운 금성 포구 안에 비단교로 갔다. 다른 말로 정자정천(鼎子亭川). 상류의 내(川)가 솥 발 모양의 물줄기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라산 기슭에서 발원한 두 개의 큰 물줄기가 금성리에서 만나 포구를 통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모양은 비 오는 날 특히 장엄하다고 한다. 바다와 민물 천이 만나는 곳에 아치 모양으로 세워진 비단교에 올랐다. 앞뒤로 멀리 바다와 한라산이 마주 섰고, 다리 아래 보말과 물고기가 무리 지어 있었다. 해변을 지나 좀 높은 곳에 정자 한 채와 곁에 작은 샘이 있다. 남당암수. 금성리 해안가 용머리에서 솟아오르는 물은 이곳 사람들의 식수였다. 모두 곽금 8경의 하나.



오후가 될수록 기온이 크게 높아졌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애월빵공장이란 특이한 상호가 있었다. 파라솔이 펴진 야외 벤치에 사람이 많은 것이 유명해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 빵은 제주도 명물을 본뜬 모양이었다. 맛만 보기 위해 현무암 빵, 당근 케이크, 한라봉 빵을 하나씩 샀다. 적당한 단맛, 폭신한 식감이 괜찮았으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서울에서라면 아마 선뜻 고르지 못했을 거다.


숙소로 오자마자 아이는 애플망고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반 조각을 먹더니 더 찾지 않는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물릴 만큼 배불리 먹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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