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서른 이틀 < 비양도 >

by 준환

비양도 – 명월국민학교카페


제주도 부속 유인도는 여덟 개다. 숙소에서 비교적 먼 가파도나 마라도는 다녀왔으나, 가장 가까운 곳을 빠뜨렸다. 오늘 목적지는 십수 년 전 가본 비양도다.


배편은 앱에서 예매되지 않아 출발지인 한림항 여객터미널에서 표를 살 수 있다. 들어가는 시간은 오전으로 끊고, 나오는 건 한 시 반으로 미리 정해두었다. 오후에는 짐을 싸야 한다.


한림항에서 비양도는 매우 가깝다. 일 킬로미터 남짓하여 맨눈으로도 섬에 있는 집과 꼭대기 기상관측소가 모두 보인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잔잔해서 실력 좋은 사람은 수영으로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입담 좋은 선장님의 안내 방송은 섬 여행을 더 설레게 했다. 이윽고 만석인 배가 출발했다. 비양도 선착장까지는 십오 분, 주민 수보다 많은 승객이 이른 시간 이미 들어왔다가 돌아가려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통행로를 비집고 지나니 부둣가 정면에 새로 생긴 노인회관과 그 주위로 음식점과 카페가 서너 개 들어섰다. 변함없는 건 ‘호돌이식당’ 낯익은 간판. 예전 추억을 되살려 그리웠던 곳으로 갔다.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던 음식점은 이제 둘이 되었다. 본 점포는 며느리가, 상호를 달리해 새로 낸 곳은 딸이 맡고 있다. 우리가 앉은 옛 가게는 이미 테이블 절반 이상 차 있었다. 보말죽 두 그릇을 시켰다. 예전보다 양이 좀 줄었는데 맛 차이는 없었다. 잘 다져진 보말 내장과 참기름이 고소한 향을 냈고, 깊은 감칠맛이 혀에 진하게 감겼다. 한달살이 동안 서너 군데 맛본 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아마 예전 기억이 더해져서 인지도 모른다. 물회와 해물라면 시킨 젊은 사람들, 문어숙회 한 접시에 막걸리를 곁들인 육십 대 아저씨들 모두 만족스러워 보였다. 죽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주인아저씨가 테이블 곁을 지났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기대하지 못한 인심, 갓 끓인 건 더 맛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재빨리 응답했다. 작은 국그릇에 담긴 죽은 뜨거운 김을 폴폴 내며 아까보다 진한 냄새를 풍겼다. 호호 불어 한 숟가락 입에 넣으니 기대한 그대로였다.

* `26년 현재는 새로운 위치인 호돌이식당 2호점만 운영한다. 예전 가게는 민박으로 바뀌었다.


정상인 비양봉에 오르려는데 해가 강해 오르막 입구에서 일주 해안로로 바꾸었다. 예전에는 포구 반대편 중간에서 끊겼으나, 지금은 원형의 한 시간 남짓한 길로 모두 이어졌다. 둘레길을 따라 코끼리 닮은 바위와 비양도 화산탄을 둘러보고 몽돌해변으로 내려갔다. 그 위 일부를 덮은 초록색과 갈색 해초, 그리고 검은 돌과 바다 빛깔이 함께 모여 아름다웠다. 한 바퀴를 거의 돌았을 무렵 선착장 가까이 넓은 습지가 있었다. ‘펄랑못’. 밀물 때는 해수가 밀려들고, 썰물 때는 차오른 지하수로 담수가 되는 독특한 지형이다. 길이 오백, 폭 오십에 깊이가 이 미터 내외로 섬 크기에 비하면 상당히 넓었다. 주변에는 나무 덱의 산책로가 꾸며졌으나 남은 시간이 짧아 멀리서만 지켜볼 뿐. 그 뒤편 언덕으로 해송과 억새, 대나무, 질경이 등 식생이 풍부했다. 이만 년은 작은 화산섬을 아기자기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내일은 돌아가는 날. 섬에서 나와 바로 돌아오기 아쉬워 명월성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명월국민학교는 첫 손님들이 돌아가기 전날 마지막 일정을 함께 했던 곳이다. 그때 어른들은 언덕 위에서 한림항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빠졌고, 아이들은 예전에 운동장이었던 바람개비 도는 넓은 풀밭에서 한참 뛰놀았다. 교실 일부에 마련된 소품 판매장을 둘러보거나 창밖이 보이는 복도 테이블도 앉아 쉬기에 괜찮았으나 오늘 세 식구는 안에 차분히 앉았다. 나와 아이가 별 표정 없이 빨대만 휘휘 젓는 모습에 토라진 아내는 얼마 안 돼 일어났다. 초밥집에 이어 두 번째라 더 미안했다.


돌아갈 짐을 꾸리고 갈치구이 집에 갔다. 그동안 읍내를 오가며 보기만 해 궁금했던 곳. 막걸리 안주로 먼저 동태살 전을 갓 구워내주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살점이 일품. 이어 나온 갈치 양이 예상보다 많았다. 아무리 냉동 제주산이라지만 분명 이렇게 많이 시키지는 않았는데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이 인분을 시켰는데 맞아요?” 잠시 멈칫하던 직원. “저희 실수네요. 주문하신 가격에 드릴게요.” 밥은 놓아두고 살점을 숟가락으로 한껏 먹었어도 남는 양이었다. 손해가 클 테지만 동네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인 듯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맛도 좋아 다시 가려 위치를 저장해 두었다.

* 기억에 남는 갈치구이 집은 두 곳이다. 한림 읍내에 있는 황성옛터는 냉동갈치, 곽지해수욕장 뒤편 황금가마솥밥은 생물 갈치로 조리해 준다. 원물 상태가 달라 어느 곳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두 가게 모두 친절하고 본 재료의 맛을 잘 살렸다고 느꼈다.


아이를 재우려고 이른 시간 누웠다. 마지막 밤 뒤척이다가 새벽 두 시에 깨 밖으로 나갔다. 사월보다 오월, 여름으로 갈수록 밤하늘의 별이 선명했다. 지난번 백조자리에 이어 오늘은 전갈자리와 목동자리를 익혔다. 이렇게 한 달 보내면 큰 별자리는 웬만큼 배우겠다 싶었으나 이제 남겨진 시간이 없다. 별이 쏟아지는 느낌이 그리워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더 기다렸다. 바다 쪽 하늘은 고기잡이배로 인해 별빛이 희미했으나 한라산 쪽은 달랐다. 처음에는 밝은 것 몇 개만 눈에 도드라졌으나 시간이 지나며 원하던 모습이 나타났다. 밤이 점점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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