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불행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행을 너무 많이 겪는 건 신이 부른다는 소리이고, 선택받은 거라고 누가 말했다.
당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불행하게 만드는 신의 큰 그림이라고.
신이 불행을 인질로 ’연극’(본래 표현은 ‘사기극’이지만 최대한 순화해서 변형했다)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애연가와(애연가는 내 친구다)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너는 신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가 물었다. 이 질문을 하는 순간에도, 그가 피는 그의 담배 연기는 언제나 그렇듯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반문했다. 너는 언제부터 담배를 피기 시작했냐고. “너가 담배를 무의식적으로 피기 시작한 것처럼 나도 신의 존재를 무의식에서 시작해 의식으로 옮긴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애연가는 신이 존재한다면 불행은 왜 있는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불안’이 핀 수많은 연기들을 보면서 “불행이 아예 없다면 사람들은 신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대신 ‘다행 중 다행’이라고 말하게 되니까 그러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나에게 불행이란 늘 있는 일이고 다행과 불행은 마치 이웃사촌 같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오늘 어떤 일이 다행이였다면 내일은 1/2 확률로 ‘또 다른 다행’ 또는 ‘불행’이 나를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불행과 불행’, 또는 ‘불행과 다행’, ‘다행과 불행’, ‘다행과 다행’이라는 네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신은 돌림판을 돌리듯 우리의 삶을 엄습하는 것이다. 대개 이런 상황이 되면 신을 믿는 사람들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최후의 일격에 쓰러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진다. 다만 신을 믿는 이들은 진드기처럼 철썩 달라붙어 불행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전가한다. 이것이 ‘기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기도라는 정답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불행=불행으로 받아들이고 슬픔의 늪에 빠져든다. 슬픔의 늪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다.
밑빠진 독에 불행을 전제로 흘리는 눈물을 채우는 것, 단지 그 뿐이다.
사람들은 불행을 만나면 울게 되고 밤낮으로 흘리는 그들의 눈물은 자연스레 그들의 양식이 된다.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불행을 일상의 하나로 수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쉽게 말해, 불행+불행-불행=0이 되는 것인데, 불행이 0이라는 뜻은 불행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되, 불행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우리의 주변을 맴돌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으로 여기자는 것이다. 마치 공기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기가 내 삶의 주요 목적은 아닌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불행은 전지적 시점에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 순간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이 얘기를 어떻게 정리해서 말해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덧 불안의 연기를 다 피우고 난 애연가가 말했다.
“자, 그럼 드라이브를 시작해 볼까!” 불안은 담배 연기처럼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매개로 힘을 빠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오늘 새 출발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다행 중 다행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