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어달리기 Jul 27. 2022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사랑의 여정에 함께해준 사하에게

안녕하세요 사하님,


어느덧 8월이에요. 보란 듯이 폭염주의보가 내렸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다 보면 계절감이 물씬 느껴지는 거 같아요. 가을의 편지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난 사하의 편지를 읽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어요. 아무래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편지였으니 그랬겠지요. “변치 않을 사랑이라… 사랑… 사랑…”. 모니터 너머에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며 사하가 던진 사랑의 의미를 골똘히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사랑에 배신당한 적이 있거든요.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자면, 저는 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문제였어요. 저는 자기애가 강한 편이거든요. 흔히들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죠. 실제로도 제가 그런지를 알기 위해서 테스트도 이것저것 해봤는데요. ‘카카오같이가치'라는 채널에 나르시시즘 레벨 테스트가 있어요. 저는 100점 만점에 88점, 1등급 나르시시스트가 나왔죠. 나르시시즘 레벨은 백설공주의 계모 - 자신만만 왕자님 - 백설공주 - 사냥꾼 순으로 나뉘는데요. 제 또래인 20대 여성들의 결과 중에는 ‘사냥꾼’이 30%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대요. 조금은 가슴 아픈 사실이지요.


재수 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봐도 좀 멋진데?’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어렸을 때부터 종종 있었죠. 예를 들면 학창 시절에는 운동을 정말 좋아했어요. 체육부장을 맡은 적도 많았고, 수행평가에서도 점수가 늘 높은 편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못 하는 것도 많았거든요. 예를 들면 수학이라던가 과학이요. 시험에서 50점을 넘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저는 제가 잘하는 걸 추켜세우기 바빠서 못하는 걸 외면하기 일쑤였어요.


대학에 와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저는 저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어요. ‘키키 너는 밝고 명랑한 아이니까 분명 어디를 가든 친구가 많을 거야'. ‘남들보다 머리 굴리는 속도도 빠르니 학점도 높을 거야’. ‘야망도 많고 싹싹하기까지 하니, 언젠가 대단한 걸 해낼 거야’라고요. 보통 등산할 때 내려오는 시간을 고려해서 올라가잖아요. 그때의 저는 내려오는 걸 생각하지 않은 거 같아요.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뒤를 돌아봐야겠다거나, 아래를 내려봐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올라가는 맛에 중독된 거죠.


그러다 지난겨울에 처음으로 면접을 봤는데, 처참하게 망한 거예요. 지원 동기를 묻는 면접관들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 면접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걸 본 저는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죠. 면접관들이 다시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저희는 이런 걸 물은 건데, 이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다시 차분하게 대답했어요. 하지만 면접관의 눈빛은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라고요. 질문 의도를 아예 못 알아들은 거죠.


면접을 40분 정도 봤는데요. 지원동기만 30분 얘기한 거 같아요. 제가 못 알아들어서요. 이렇게도 질문을 바꿔보고 저렇게도 질문을 바꾸시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시더라고요. 그렇게 허무하게 저의 첫 면접이 끝났어요. 저는 부끄러워서 다시는 거기에 지원하지 못했죠. 그 뒤로도 면접을 3~4번 정도 봤는데, 전부 탈락했어요. 면접은 회사와 내가 맞는지를 보는 자리잖아요.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건 제가 그 회사와 맞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전 어디를 가든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죠.


결과적으로 지금의 저는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인데요. 지금 생활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닌데, 가끔 “키키 걔는 여러모로 엄청난 애였는데, 요즘 뭐한데?”라는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괜스레 심장이 철렁해요. 연이은 면접 탈락에 취업을 포기했다는, 구리고 허접한 소식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요. 어쩌다 보니 주변의 기대도 하늘같이 올라가 있어서 곤란할 때가 많답니다 하하.


자신을 사랑하는 게 문제가 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다행히 나르시시즘을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은 아닌지라 인간관계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요. 문제는 저한테 있었어요. ‘완벽주의’가 정말 심하거든요. 저는 저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실제로도 특별해야 한다고 믿어요. 늘 남들보다 더 멋지고 뛰어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요. 그런데 워낙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보니, 실패를 마주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나의 어쩔 수 없는 구림과 허접함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말이에요. 남들이 보면 괜찮은 것조차 제 눈에는 성에 안 차는 거예요. 썸네일 이미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디테일만 몇 번이나 수정하길 반복하다 밤을 새운 적도 많고요. 일 때문에 끼니를 자주 걸러서 급체한 적도 많아요. 더 정돈되고 더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특별하니까요. 특별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저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을 사랑이라고 믿어왔는지도 몰라요(사담이지만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과 폭력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해요).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처럼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의 잘남도 못남도 차별 없이 받아들이겠죠. 그렇다면 지난 시간 동안 나 자신에게 쏟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요? …


변치 않는 사랑을 하자고 이야기해주셨는데 찬물을 끼얹어서 죄송해요. 자유로워지기 위해 솔직해지자고 했지만, 사랑은 아직 제가 풀지 못한 숙제 같아서요. 사랑 같은데 사랑이 아닌 순간들이 너무 많아요. 사랑하고 싶어서 한 행위들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된 적도 많고요. 제가 바로 그랬죠.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올해 제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는 거예요. 각기 다른 장소에서 매 순간 다양한 사랑을 마주하고 있지요. 3월에 사하를 만나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그중 하나고요. 여기서 저는 예전처럼 완벽함에 목매달지 않아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가 수없이 얘기한 덕분이죠. 이 사랑이 어떤 색과 모양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하와 함께라면 변치 않을 사랑이라는 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겪은 사랑은 사하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를 수도 있어요. 깨끗하고 순수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때로 배신도 하고 질투도 하고 화도 내는 불완전하고 이상한 진흙탕 같지요. 사랑에 사랑이 없을지라도, 일단은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해보기로 해요. 혹시 모르죠. 사랑을 이야기하다 보면 사랑이 뭔지 깨닫게 될지도요. 부족함 투성인 사랑을 오늘도 사하에게 꾹꾹 활자 사이사이에 눌러 담아 보냅니다.


날이 덥지만 이럴수록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게 좋대요. 갑자기 찬 음식을 먹으면 위장이 놀란다고 하네요. 안온하고 미지근한 하루 되시길!



2022년 7월 27일

키키 드림

이전 09화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