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 관한 이야기(1)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어른’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님, 키키예요.
최근 독한 감기에 걸려서인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은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가 유독 끌려요. <캐나다 체크인>을 보고 나서는 이효리의 <안부를 묻진 않아도>를 하루종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요. 지금은 <효리네 민박>을 BGM 마냥 틀어놓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탓에 따뜻한 프로그램을 찾게 되네요.
어느 날은 SNS를 하다가 우연히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를 알게 됐어요. 워낙 화제가 되기도 했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프로그램이라길래 냉큼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조금 아쉽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어요. 김장하 선생님의 노고를 비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다큐멘터리에서 제시하는 ‘어른다움’에 한동안 골똘했던 거 같아요.
‘김장하가 아닌 ‘어른 김장하’로 제목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시청자에게 “어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가이드를 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마음이 편하진 않더라고요. 선생님을 존경하고 칭찬하고 우러러 보는 장면으로 가득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른다움에 사회적 지표가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른이 되려면 선생님처럼 아름다운 부자가 되어야 하는 거구나, 열심히 번 돈을 나누고 베푸는 것은 물론 이런 나의 선행을 드러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는 저 자신이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의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선생님과 비교하며 나는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실제로 “선생님에 비하면 나는 어른이 되기 한참 멀었다”와 같은 댓글들이 참 많더라고요.
제가 좀 많이 삐뚤지요? 프로반골러인 저의 당돌한 말들이 사하님께(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는 어떻게 전해졌을지 조금은 두렵고 떨리네요. 부디 너그럽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저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대체 어른이란 게 무엇인지, 한평생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정녕 어른인 건지, 베풀고도 내세우지 않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어른의 미덕인지 말이죠.
답을 찾기 위해 검색도 해봤습니다. 요즘 챗gpt가 유행이라길래 인공지능에게 물어봤는데, 그 대답이 꽤 흥미로웠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보통 성숙함, 책임감, 독립성, 자립성 등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성숙한 성장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 문화적, 법적 기준에 따라 어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은 매우 다양하며, 어른이 되는 시기나 방식은 문화, 지역, 가족, 개인의 경험 등에 따라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성인이 되면 어른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각자의 삶과 상황에 따라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와 경험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어른다움의 정의를 고민하는 서적도 있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심리치료사인 모야 사너의 저서, <어른 이후의 어른>이라는 책인데요.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써야만 했다”라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사야겠다고 다짐한 책이기도 해요.
“사회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에 비해더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게 변했지만, 우리 대다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이 배우며 자라났던 어른다움의 이미지에 여전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14p, 《어른 이후의 어른》, 모야 사너, 엘리
어른다움이 가진 전통적인 기준들, 이를 테면 챗gpt가 제시한 것처럼 성숙함과 책임감, 독립성, 자립성 이런 것들은 무척 주관적인 개념이잖아요. 사람마다, 시대마다 성숙함을 다루는 척도가 다르고 달라질 수 있기에 어른다움이라는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거죠.
생각해 보면 한 세기만에 인류가 엄청난 번영을 누리게 됐고, 지금은 60대가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일컫는 100세 시대이건만, 법이나 문화, 정책 중에 여전히 구시대적 발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빠르게 변하는데 그 기틀은 잘 변하지 않으니, 변화를 빠르게 포착하는 청년들은 특히 더 압박감을 받는 거 같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현 사회가 제시하는 어른다움에 아쉬움과 찝찝함을 느끼곤 합니다.
사하님,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이 질문에 정답은 없어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어른다움이 다르고, <어른 김장하> 또한 PD가 생각하는 어른다움을 다큐멘터리로 승화한 걸 테지요. 제가 느낀 어른다움,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의 자세는 배우 이하늬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었어요.
“나이를 이렇게 먹었는데 아직도 처음인 게 있다니, 너무 좋아!!!”
배우 이하늬가 난생처음 ‘영어로 요가 티칭하기’에 도전하면서 꺼낸 말인데요. 처음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나이를 먹었는데도 처음인 것들이 있다는 건 저한테 미숙하고 미완된 느낌이라, 쉽지 않다는 뉘앙스의 얘기가 뒤이어 나오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좋다니! 그녀의 짧지만 굵은 한 마디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어요. 영상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어른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녀가 어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개념은 굳이 해당 단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잖아요.
불완전함과 불확실한 느낌을 견디는 일, 나의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즐기는 일, 나를 통제하지 않고 마음껏 욕망하고 놀고 춤추고 웃는 일.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결혼이나 취업 같은 사회적 임무를 체크하듯 달성하는 것만이 어른다움이 되지 않았으면 해요. 사하에게 전하는 이 편지가 어른다움을 향한 새로운 아이디어이자 방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년 2월 27일 월요일
키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