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속의 선배는 연말 퇴근길에 다른 부서 과장의 부친상에 조의금 부쳤고 야근을 했고 배고파 죽겠다고 말하는 후배에게, 회사 가는 게 괴롭고 사는 게 뭔지 달아나고 싶다고 말하는 후배에게, 똑같이 습관적으로 한숨 쉬는 처지이지만 얼굴 뾰루지랑 새치를 걱정하면서도 솟아오르는 웃음 터트리면 좋겠다고 말한다.
언젠가 후배에게서 꼰대 어른과 저녁 식사 후 집에 가서 구토했다거나 콜드 플레이 콘서트 피켓팅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아니, 사실은 실패했는데 원하는 요일은 아니어도 남동생이 대신 티켓팅에 성공해서 갈 수 있을 거 같다고 고백한다. 살다 보니 남동생이 쓸모가 있다면서웃음이 터진다.
결혼하는 친구의 결혼식장소가 탐이 나서 아니 그냥 친구의 모든 게 질투가 나서 배가 아파 죽겠다고 말하는 후배에게, 두 절친이 한 달 차이로 결혼해서 축사를 한쪽만 해주는 게 괜찮은지 고민되지만 정작 현실은 조카들 놀 때 사진 찍어주는 일이라는 후배에게, 가을엔 운동하다 입맛만 좋아진다고 너스레를 떤다.
얘들아, 재밌는 게 없을 땐 감사하고. 감사할 게 없으면 재밌게 살아. 집에 돌아와 포옹을 두 시간쯤 하고 두 손 모아 옆에서 숨 쉬어줘서 고맙다고. 큰 힘이라고. 네 덕에 삶이 조금은 좋아지려고 해,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는 걸 말하다가 사는 것도 좋아한다고 툭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좋아지면 교실이 좋아지는 하루처럼, 서로의 에피소드를 기다리느라 하루하루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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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솔은 노래한다. 다시 하얀 마음을 갖고 싶다고, 함께 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려 다시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라고, 그게 우리가 있을 곳이라고.
긴 여행이 될 거라
너에게 말하고
나는 떠났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면
잠시 나는 사라지고
잊힐 수 있을까
얼룩진 눈 위로 흰 눈이 쌓이면
다시 하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나눈
서로를 향한
빛나던 말들은 왜 슬픔과 함께 자라는지
이별을 앞세워 걸어가는 모든 것에
자꾸만 눈물이 흐르네
우리가 나눈
서로를 향한
빛나던 말들은 왜 슬픔과 함께 자라는지
이별을 앞세워 걸어가는 모든 것에
자꾸만 보고 싶은지
함께 했었던
그 시간들이
홀로 걷는 나를 따라와 안아주었지
허무했던
외로웠던
그 마음 위로
자꾸만 흰 눈이 내리네
발길을 돌려 걸어가네
내가 있을 곳으로
모두가 있는 곳으로
허무에는 아무것도 없다.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없는데 채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채우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이승우와 앙드레 지드를 읽다가 몇 가지 구절에서 멈춰 선다. 늘 그렇듯이 보편적인 가을, 누군가가 미리 겪어서 소화시킨 가을이 있다.
아,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원했겠는가. 원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나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연인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는 내가 필요했다. 그녀는 완전해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했다. 그런 관념을 통해 나는 만족을 얻었다. 그렇게 밖에 사랑하지 못한, 그것이 나의 불행이었고, 내 사랑의 예정된 비극이었다.
나타나엘이여,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마라. 결코 머물지 마라. 나타나엘이여,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거나 또는 그대가 주위와 흡사하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란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너의' 집안, '너의' 방, '너의' 과거 보다 더 너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그 흔한 사랑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실체를 본 사람도, 제대로 전공한 사람도 없다. 땅바닥에 구르는 사랑에 누가 관심이 있겠는가. 뜨겁게 타오르지 않고, 차갑게 식지 않는 적당한 온도의 사랑은 귀하다. 사랑은 동그랗게 굴러간다. 자신을 소비하면서도 사랑은 제 모습을 지킨다. 소비하면서도 소진되지 않는다. 정의하려고 하면 사라진다. 사랑은 사라진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고 그래서 보인다. 그걸 오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사랑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 아니, 사랑의 의미가 없다. 사랑의 의미를 구태여 찾아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의 온도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사랑의 온도를 감지하는 일이 이 가을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자신을 잊고 사랑이 되는 일. 문득, 사랑을 공부한 사람이 떠올랐다. <사랑의 기술Art of Love>을 쓴 에리히 프롬. 15살에 처음 에리히 프롬을 읽었을 때 나는 그저 Art가 예술이 아니라 기술로 해석된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