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서모임에서 딱 한 번 신유진 작가를 만났고 그 후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여전히 궁금한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글을 읽는 내내 자주 놀랐다. 연극 전공자이고 작가, 번역가, 그리고 자칭 카페 르믈랑 알바로 일하며 프랑스인 남편, 반려견 이안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외에도 비혼 동거 계약인 PACS나 하이틴 소설 등 지극히 사적인 에피소드도 재밌었지만 엄마, 글쓰기, 여성이자 딸이자 작가이면서 번역가인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하나하나 풀어내는데 어째서 독자인 내 삶을 훑은 것처럼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예쁜 표지와 엄마의 책장이라는 소재에 끌려 시작했지만 나는 읽는 내내 뭔가 적고 또 적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더 천천히 더 자주 쓰면서 읽고 싶었다.
등 돌린 존재들은 어느새 서로 마주하고, 그건 혼잣말이 혼잣말을 만나는 일이자 한 권의 책이 세 사람의 대화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나와 엄마와 사강의 이야기. 51
'나와 엄마와 사강의 이야기'는 혼잣말들이 모여서 각자의 토양을 이해하고 새로운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모녀 서사이면서 여성 서사이기도 한 이 글에는 버지니아 울프, 엘렌 식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비비언 고닉,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여러 여성 작가가 등장하는데 여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울프의 말에서 약간의 진실이 섞인 아름다운 거짓을 읽으며 간직할 만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독자 자신이 능동적인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특히.
엄마의 책장 속 책과 질문을 통해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엄마를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 나의 욕망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내 안에 새겨진 여성들을 통해 여성성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려는 시선에서 솔직함을 넘어 직면하는 용기가 부러웠다. 여성의 텍스트를 '여성적' 텍스트로 오해하면 앞으로 살아갈 여성들은 인정 욕구와 피해 의식에 절어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토양을 이해하고 수용한 후에야 고유의 토양을 만들고 굳건히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말에 갇힌 것들을.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엄마가 금을 낸 그 여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내가 살아갈 땅을 찾는 중이다. 나의 땅은 여성 명사이고, 나는 그 땅 안에서 쓴다. 내가 틀린 것을,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을. 그럴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114-115
글을 쓰면서 늘 고민하는 건 목적과 방향성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이 글은 누구에게 가닿는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모녀 서사로 시작해 사랑을 쓰는 일에 대한 깊고 치열한 글 속에서 얻는 게 많으리라 확신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겐 '낯설게 보고, 솔직하게 쓰기'라는 미션이 주어졌고, 여성의 텍스트에 대한 애정과 내 토양에 대한 의지가 자라났다. 이 책엔 여성이라면,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면, 아니 여성에게서 태어났다면 필요할 질문들로 가득하다. 나의 토양은 믿음을 거름 삼아 비옥해진다. 사랑을 연습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누구든 마음속에 질문들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질문들이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