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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서두르는 마음

by 뭉클


대전 시립 미술관 열린 수장고에서 엄유정 작가의 '모레이의 부피들(moray volumes)'를 감상했다.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들 앞에 서있었지만 작가는 어떤 이국적인 설렘보다는 배경과 맥락을 생략하고 좀 더 가까이 관찰하기를 택한 듯했다. 식물 특유의 곧은 선과 방향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거대한 화폭에는 제 모양대로 뻗은 잎선을 잡아주는 곧은 줄기가 있었고.



선에 대한 감각은 작가가 스코틀랜드에서 직접 작업해서 데려왔다는 56점의 그림들 속에서 부피로 확장되었다. 우리는 같은 초록 속에서도 어쩜 이렇게 제각각 아름다울까. 다양성의 미덕은 초록의 무난함 속에서 극대화되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이전 작품을 본 후여서 그런지 선들이 모여 형태를 이루고 각기 다른 부피를 이루는 하나의 여정처럼 느껴졌다. 삶이 밋밋한 건 우리가 초록색이어서가 아니라 초록이 n개의 톤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잊고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린 수장고에서 봤던 또 하나의 전시에서 흥미로웠던 건 비누로 만든 도자기였다. 역사적, 문화적 색채를 모두 지우고 일상에서 흔히 쓰는 비누로 만든 작품들은 기존의 관념을 깨고 창의적인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었다. 언제나 예술은 가벼워지려 한다. '왜 안 돼? 이렇게 생각하면 왜 안 되는데?'라고 되묻고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가볍게 만들고 시각이 확장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연금술사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너희가 곧 신임을 모르느냐?"는 이후에 보게 된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연금술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계몽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 목적이란 단순히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신으로의 승격과 같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나한테 이걸 해낼 능력이 있을까?' 만큼이나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 '이런 일을 하는 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인데 이 작품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다들 겉으로 볼 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같지만 우리가 종국에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버리고 비우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평온한지. 혼자 잘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아도 우린 얼마나 전체 속에서 취약한 존재인지. 가리거나 개의치 않고 덤덤하게 살아내는 사람의 단단함은 어디서 오는지. 자주 생각하는 삶에서 속도와 방향성을 모두 품은 이 말은 삶의 정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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