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레 케르테스, 1990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를 모두 포함해도 200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얇은 단행본을 펼쳐들면, 잠자코 기다렸다 독자를 덮쳐드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손이다. 동등한 무게를 지닌,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사실 처음부터 이음동의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두 손:
(1) 비명과도 같이 터져나오는, 재고와 설득의 여지 없는 "아니요!"
(2) 그리고 이어지는 말장난과도 같은 어지럽고 긴 덧붙임. 나는 바로 그 즉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뜻한 기분으로 새 책을 펼친 독자는 겨우 이 만큼을 읽고도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단말마의 손과 비장한 모호함의 손에게 양 어깨를 붙들린 채, 어쩔 도리 없이 이번 독서는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작품의 시작, 말 그대로 '시작'에 강렬한 부정어가 단독으로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독자에게 의미있는 힌트를 준다. 이 작품을 읽는 일은 견고한 확신으로 더 이상 짧아지지 못할 만큼 응축되어 내면으로부터 마침내 터져나온 그 한 단어의 함의와 기원을 낱낱이 분해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것. 뒤이어 나올 수천 수만 자의 글자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그 글자들이 엮인 형태와 그것들을 엮고 있는 실들의 색채를 끈질기게 만져가면서. 단말마의 부정어가 뿜어내는 폐쇄성으로부터 이미 어느 정도의 피로를 느끼면서.
그리고 곧장 불친절하고 혼란스러운 덧붙임, 즉 두 번째 손이 따라오는데, 이 겨우 두 문장에서 이미 작품이 가진 형태와 색채를 짐작할 수 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의 형식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문단 구분이 극히 적고 수많은 쉼표의 나열로 문장은 길게도 이어지며 연결어와 대명사는 혼란스럽다. 간단히 말해 의식의 흐름 기법의 전형으로 쓰였는데, 그 의식의 다양한 주제도 뒤죽박죽으로 연결된다. 현재진행형의 대사나 사건도-'쓴다'와 '생각한다'를 제외하면-, 관계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기억과 인용만으로 채워진 독백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룬다.
철학자와의 짧은 대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이혼한 아내와의 첫만남, 조각난 채 메모로 남겨진 과거의 생각들, 아버지와의 관계, 악과 선, 헤겔과 카프카와 괴테와 베른하르트와 니체의 인용, 아내와의 관계, 신경증에 동반되며 분출하는 창작욕, 아우슈비츠, 존재와 운명, '자유', 권력과 부조리, 허공에 펜으로 파내는 무덤의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산발적으로 나열 혹은 반복되어 무질서하게 엮이며 힘겹게 끝으로 나아간다. "아니요!"와 정확히 같은 "안돼!"는 여전히 곳곳에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죽음이 아닌 '살아냄'의 문제를 표방하는데, 바로 그 '살아냄'이 이해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작가를 비껴간 죽음의 어색한 변종이자 연장선일 따름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케르테스에게 살아낸다는 것은 곧 펜을 든다는 것을 의미하고(글을 쓰지 않는다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쓰는 일은 허공에 (다른 수감자들이 파내고 있던) 무덤을 마저 파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가 말하듯, 그에게 앞을 보는 일은 곧 과거를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반추하며 자신의 무덤을 마저 파기 위해 살아있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깨를 잡은 두 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니요!"와 "안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발작적 거부가 된다. 그 모든 것들을 겪은, 이제는 오로지 펜으로 자신의 무덤을 완성시키는 것만을 '살아냄'의 목적으로 갖는 그가 자신의 운명적 연장-생식-을 바랄 리 없다. 무덤이 완성될 때 존재는 반드시 과격하고 필수불가결하게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겪은 것과 동일한 세상에, 그 자신의 존재를 존재 가능성으로 가지는 존재를 무감히 던져둘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그의 삶 속에서 청산되어야만이 그가 겪은 모든 일들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너의 비-존재를 나의 존재의 과격하고 필수 불가결한 청산으로 간주하는 것. 왜냐하면 단지 그래야만 모든 것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제 뒤이은 혼란스러운 덧붙임도 이해할 수 있다. 생식은 생명체의 변함없는 제1의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관해 가벼운 질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듯 온몸으로 거부한다. 이렇듯 반본능이 본능을 대신하여 마치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 이것이 그의 삶이 그에게 부과한 결과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텍스트 형식상의 까다로움과는 별개로 의미를 종합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끝없이 이어지는 무질서한 중얼거림들이 오로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형식과 일관적인 모노톤의 색채는 서로를 보완하며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종장에 이르러 작가는 '살아냄=쓰기'를 통해 스스로 존재를 청산하는 작업을 돌연 포기하고 부정하던 신을 불러내는데, 이 급박한 포기는 다소 뜻밖으로 느껴진다.
마치 어두운 강의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속으로라도,
가라앉으려는 듯
오 하느님!
저를 가라앉히소서
영원히
아멘.
작품에서 내내 반복되던 허공에의 무덤이라는 주요한 실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어두운 강의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속으로', '하느님'이 자신을 '영원히' 가라앉히기를 소망한다. 생식까지 거부해가며 행하려던 청산은 스스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작품이 유대 전통의 위령 기도kaddis 형식을 차용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기도의 전형적인 마무리로 작품을 끝마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는 연극적인 효과만을 위해 작품의 전체 틀을 흔들어놓는 경솔한 마무리가 되었을 뿐이다.
20살에 나는 함께 연합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가 소개해준 교외 독서모임에 몇 달간 참여했다. 그때 읽고 토론한 작품 중 하나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였다. 케르테스와 마찬가지로 나치의 집권기를 겪은 루마니아계 유대인 작가인 뮐러는 <숨그네>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숨막히게 밀도있는 언어로 표현했다.
마치 그네가 바람에 가볍게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듯, 그렇게 흔들리기를 강요받은 숨. 부조리하고 잔인한 권력에 틀어잡힌 생명.
그 작품을 읽던 순간들에 느꼈던 충격을 내 신체는 기억하고 있다. 처참하고 집요한, 내게 아주 오랫동안 망설이며 말을 고르게 했던 문장들. 실재했던, '존재하는 것이 불가피한' 역사의 문학.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를 읽으며 자연히 <숨그네>를 떠올리게 되었다. 케르테스에게도 <숨그네>와 비슷한 내용인 <운명>이라는 작품이 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운명>처럼 강제수용소의 잔혹한 실태를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그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 자체를 그려내고 위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숨그네>와 이 작품을 비교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 부당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이 <숨그네> 만큼 날것의 울림으로 와닿지 않았던 것은 이 작품이 세계와의 화해를 모색하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 형식을 보나 내용을 보나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어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자폐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라는 벽 너머에 있는 모든 실존, 세계, 가능성을 거부하고 비난하며, 그 거부행위에 대해 일종의 만족감까지 느끼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강제수용소와 반유대주의만을 처형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아버지)와 교육(기숙학교), 나아가 모든 권력체계를 소환한다. 그에 따르면 낡은 정권, 성채, 질서는 끊임없이, 거듭 새롭게 떠오를 것인데, 그렇다면 가정과 교육과 국가라는 세계의 세 기반은 모두 갱생의 여지 없이 암울한 세계를 생성하고 지탱할 뿐이다. 사랑(아내와의 관계)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모색하지만 아내는 그의 자유가 착취와 공포를 필요로 하는 저항의 자유일 뿐이라고 정확히 진단한 후 그를 떠난다. 그는 아내를 잡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교육과 권력질서에서 희망도 전복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타고난 부적응만을 무력하게 인식한다.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냄으로써 스스로 이룩하는 존재의 청산을 다짐하지만, 종장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언급된 적조차 없는 하느님을 불러내며 자신을 영원히 가라앉혀 줄 것을 청원한다.
모든 문학이 반드시 세계와의 화해를 모색할 필요는 없다. 특히 인간에 의해 인간이 당한 일방적인 학살을 그린 작품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일견 오만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홀로 작은 책상 앞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계에의 고통스러운 거부과 자신이 자초한 소외감만을 끝없이 읊조리는 작품이 문학으로서 강력한 힘을 가질 수는 없다고 믿는다. 설명할 수조차 없게 깊은 위로와 단단한 힘을 주는 반대의 예들을 우리는 이미 만나왔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것과 같은 답답함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기회가 된다면 <운명>도 읽어본 후 작가에 대한 내 평가에 변화가 있을지 알아봐야겠다.
"아니요!" 나는 바로 그 즉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9)
선명해진 그 문제: 나의 존재를 너의 존재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것, 일련의 인식이 비추는 빛 속에서, 그리고 소진되어 가는 시간의 그림자 속에서 그 문제는 이렇게 바뀔 것이다: 너의 비-존재를 나의 존재의 과격하고 필수 불가결한 청산으로 간주하는 것. 왜냐하면 단지 그래야만 모든 것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49)
말하려는 강박 관념은 순전한 침묵, 발화된 침묵에 다름 아니다 (50)
그렇다, 아우슈비츠가 실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아주 오래전, 누가 알겠는가, 셀 수도 없는 파렴치한 행위들의 광선 속에서 익어 가다가, 마침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검은 열매처럼, 결국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피하다,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56)
그런 까닭에 이런 기체류의 응집 상태에서는 오직 행위만이, 순전히 행위만이 단단해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행위만을 우리는, 말하자면, 손에 넣을 수 있으며 파고들 수 있다, 수정과 같은 벙어리 광물 한 덩어리를 파고들듯이. (65)
두 가지 다 발버둥이다, 사는 것은 오히려 눈이 먼 발버둥이고, 글을 쓰는 것은 보려는 발버둥이다, 그것은 어쩌면 삶이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보려는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삶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되풀이한다, 마치 그것이-글쓰기가-삶인 것처럼, 그것은 근본적으로, 감히 견줄 수도 없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비교도 안될 만큼 삶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삶에 대하여 쓰기 시작하는 그 최초의 순간부터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67-68)
중요한 것은, 고통이 생성되고,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통해 내가 어떤 종류의 진실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그러한 진실 가운데 살지 않는다면, 누가 알겠는가, 그 진실은 어쩌면 나를 냉담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77)
나는 썼다, 나는 알지 못한다고, 나는 썼다, 왜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을 삶 대신에, 나에게 우연히 할당된 이 망가진 파편들을 살아 내야만 하는 것인지를: 이 성별을, 이 육체를, 이 의식을, 이 지리적인 현장을, 이 운명을, 언어를, 역사를, 셋방살이를, 왜 내가 살아야만 하는 건지, 나는 모른다고 썼다. (94)
그것을 써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쓰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행복이란 어쩌면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그것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적었다, (...) 삶을 글로 쓰는 일은 삶을 물음에 던지는 일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물음에 던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삶을 이루는 것들로 질식되고 있거나 어쨌든 그 안에서 기형적으로 틀어지고 있는 자뿐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을 찾기 위함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나의 글쓰기로 고통을 구하고 있다, 거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그렇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이 곧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오로지 하나의 매우 단순한 답이 있을 뿐이라고, 나는 적었다: 진실은 나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120-121)
그리고 그것과 함께 기도의 단조로움이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는 것을 배웠다, 반복에의 집착, 이 기이한 위생 관념을... (141)
왜냐하면 공포라는 것은, 여보, 나는 나의 아내에게 말했다, 다양한 변수들로 작동되는 것인데,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로 굳어지면, 그것은 드물지 않게 단지 미신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리지. (148)
그리고 증오가 뒤섞인 경외심, 우리 아랫것들이 권위의 현현 앞에서 보여 주는 경외심 같은 것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이중성에 너무 잘 들어맞는 것이지. 비록 엄숙함이, 나는 나의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때때로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무너지며 파렴치한 비웃음으로 가득한 심연으로 추락하기도 하지만, 그 심연으로부터 거기 둥지를 튼 악마들의 미친 환호성이 들려오고, 그리고 몹시 훼손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위용을 갖춘 전함의 잔재가 건져 올려지는 것처럼, 낡은 정권, 성채, 질서는 끊임없이, 거듭 새롭게 떠오를 것이라고. (149)
하지만 내가 줄곧 언급했던 자유는 나에게 있어서, 나의 아내가 말했다, (...) 사실은 그 어떤 자유를 의미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자유라는 관념 아래서 드넓고, 강하고, 포용적인 어떤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거기에 또한 책임, 그렇다 사랑이 따르는 어떤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내가 이야기한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아니다, 나의 자유는 언제나 실질적으로 항상 어떤 것에, 혹은 누군가에게 반대하여 저항하는, 그 어떤 일 또는 인간들을 반대하는 자유였다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공격이거나 도피, 혹은 동시에 그 둘을 모두 포괄하는, 그것이 없이는 나의 자유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나의 자유란 그것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그렇게 보이는-것이기 때문이라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어떤 것 혹은 누군가"가 없을 때면 내가 그렇게 매달릴 어떤 관계를 고안하고, 그리고 만들어 낼 것이라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또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기 위하여. 그리고 내가 자기에게 이번에도, 이미 수 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 끔찍한,-내가 이번 한 번만큼은 자기가 후련하게 이야기하도록 놓아두어야 하는데-이 가련한 역할을 무자비하고도 교활하게 또다시 맡겼다고, 나의 아내가 말했다 (165)
마치 어두운 강의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속으로라도,
가라앉으려는 듯
오 하느님!
저를 가라앉히소서
영원히
아멘.
(172)
케르테스는 독실한 유대교 신앙인은 아니지만 망자를 위한 유대교식 기도에서 소설의 제목과 구성을 따 왔다. 소설 제목에 사용된 용어 카디시(Kaddis)는 히브리어-아람어로 신성함을 의미하는 고대 유대인의 기도로서, 하느님의 위대함, 전능함과 자비를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카디시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음을 표현하고자 유대교 회당에서 상을 당한 자들이 암송하곤 한다.
(...)
케르테스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위령 기도를 하려 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을 노래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특권과 명령에 대한 단호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작품 해설, 이상동, 174-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