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LS May 12. 2022

우인


#1. 그리운 우인에게.     


우인, 그간 통 연락이 없었지? 편지 쓰는 것을 엄마에게 들켰다간 큰일이 나서 시간을 내는 것도, 용기를 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미안해.


네가 지내는 곳은 요즘 어때? 다들 잘 지내고 있어?

여기는……. 지난 편지에서 말했던 그 일 이후 사람들이랑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지난 편지가 작년 겨울이었으니까 1년 3개월 정도 됐겠구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니. 암흑같이 답답한 시기라 이 터널의 끝이 있기는 할까 싶은 생각이 자주 들어. 사람과 만날 수 없는 세상, 나 같은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감옥이 따로 없지. 지난 2년이 참 힘들었어.


사람들은 지금의 이러한 현상을 ‘관계 지양(關係 止揚)’이라고 불러. 한국 사람들이 처음 이름 붙인 거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관계 지양’이라고 하더라. 하긴, 요즘 한국어 못하는 사람이 잘 없긴 하지. 어떤 사람들은 ‘내향주의’라고도 해. 옛날에 있던 ‘개인주의’, ‘이기주의’ 너도 들어봐서 알지? 아예 인간관계를 하지 않으려는 요즘의 ‘내향주의’랑은 또 달라서 다들 구분해서 부르더라고.


엄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말 한 마디라도 섞을까 노심초사야. 사람들이랑 가까워져 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다면서 그저 집에서 아바타들과 놀라고만 해.

우인이 너 우리 아파트에 놀러 왔을 때 같이 갔던 놀이터 기억나? 그 놀이터도 싹 밀려서는 나무만 몇 그루 남아 있어. 벤치 하나조차 없지. 엄마가 가끔씩 외출을 허락해주면 나는 그 놀이터가 있던 곳으로 가서 나무 그늘에 앉아있곤 해. 그럼 너와 놀았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엄마 몰래 주변에 말 걸 사람이 있나 살펴봐. 그러다 보면 나무 그늘에서 바람이 살랑거려 누군가 다가올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이제는 내 곁에 너도, 그 누구도 없음에 우울해지기도 해. 그래서 요즘엔 엄마에게 외출시켜 달라고 조르지도 않아. 나가도 결국 나 혼자니까.     


네가 사는 곳은 괜찮아? 너희 부모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속전속결로 지구를 떠날 생각을 하셨는지.

우리 엄만 너네 집이 이사 갈 때 우리도 따라갔어야 했다며 뉴스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얘기해. 난 지금이라도 가자고 하지만 엄마는 화성 땅값이 얼만 줄이나 아냐며 꾸중만 하고. 이사 얘기 먼저 꺼낸 건 엄마면서 말이야.     


그래서 넌, 화성에서 친구들 많이 만났어? 그곳에선 친구랑 놀 수 있다며?

나도 아바타가 아닌 진짜 사람이랑 친구를 하고 싶어. 네가 많이 그리워.     


엄마가 오는 것 같아. 다음에 또 편지할게.


2081년 7월 3일 목요일


사랑을 담아,

지오.               




#2. 보고 싶은 우인에게.     


우인아, 안녕? 잘 지냈니?

그래도 이번엔 다행히 두 달 정도 만에 편지를 쓸 수 있게 됐어. 엄마가 격리를 당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거든. 너무 걱정하지는 마. 엄마가 회사에서 일을 당하셨는데 그래도 요즘엔 격리 기간도 짧고, 치료도 예전보다 신속하고 정확해져서 지금은 많이 회복되셨어.     


그래도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 집에 일어나니까 놀랍긴 하더라. 인간성이 아무리 파탄난 시대라고 했기로서니 엄마가 그렇게 직장에서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오실 줄은 몰랐어. 경찰 조사 내용을 들어보니 가해자도 다른 데서 피해를 받아 그 화풀이를 우리 엄마에게 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인격 테러가 유행이라 지금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그래도 내 얘기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경찰이 내가 모르게 하려고 하긴 했는데, 우리 집에 찾아와 엄마랑 이야기하는 게 얼핏 들리더라고.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경찰에게 이야기하는데……. 엄마가 내가 들어본 세상의 심한 욕이란 욕은 다 들었더라고,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범위 밖의 음해와 인신공격도 당했고 말야. 폭행을 하려는 으름장도 들렸는데. 나는 그날,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을 추구하는지 알았어.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가도 이런 인격 테러가 이렇게 자주 일어나니 피할 수밖에. 숱하게 이야기로만 듣던 관계 지양을 피부로 체험한 날이었어. 사람이 끔찍하고 무서웠어.     


그 사람은 구속이 됐고, 곧 판결이 내려질 거라고 해. 요즘은 이런 사건이 워낙 많으니 재판까지 가지도 않는대. 즉결심판이라나? 지역별 관할 경찰서에서 경찰이 판결을 내리는 걸로 2주쯤 전에 시행령이 바뀌었어. 인격 테러범이 요즘 워낙 많다 보니 포화상태라 법원에서 다 수용을 할 수가 없대.

부디 그 사람이 경찰과 연줄이 없길 바라. 지난 번에 듣기로는 인격 테러 5범인 사람이 고위 공무원 아들이라 사회봉사 5시간 받고 끝났다더라고. 요즘 한창인 학교 철거 작업 명령이 내려졌다던데, 인격을 테러한 사람에게 학교를 없애는 게 교화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제발 우리 엄마에게 가해한 사람은 큰 벌이 내려졌으면 좋겠어. 가족이라곤 엄마밖에 없는데 미성년자인 나를 혼자 집에 두게 한 것도 가중처벌 조건이 되게 탄원서라도 넣으려고. 인터넷 찾아보니 그러면 도움이 된대. 그래도 사람들이 인터넷에 인격 테러 심판 후기를 많이 올려놔서 다행이야.     


엄마에게 3D 통화가 와서 이만 줄일게.


다음엔 좀 더 밝은 이야기로 만나고 싶다. 잘 지내.     


2081년 9월 3일 수요일


행운을 빌며,

지오.               





#3. 우인에게.     


우인아, 나 지오.


지난번에 편지 금방 쓰겠다고 해놓고 또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네. 1년 정도 만인가?     

화성은 어때. 넌 어떻고?

너에게서 이야기를 못 들은 게 몇 년인지 모르겠다.     


지구는 그래도 좀 나아지고 있어. 그동안 정신의학 전문 기업들에서 만든 인간관계 회복 프로그램이랑 여러 가지 새로운 약제들이 임상 실험을 통과하면서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도모하려고 여기저기서 노력 중이야. 그래도 이제 인격 테러범도 가장 많았던 때에 비하면 10% 정도로 줄었고, 범죄도 덜 험악해져서 피해자 격리 입원 치료 기간도 3일로 줄었어. 엄마는 망각제를 잘 챙겨 드셔서인지 후유증 없이 잘 나으셨어. 나도 약 먹을까 하다가 크게 힘든 건 없어서 약은 먹지 않았어.     


어제부터는 엄마가 외출 제한도 풀어줬어. 물론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는 것도, 놀이터가 다시 생긴 것도 아니지만 왠지 설레고 좋더라. 동네에 벤치는 몇 개 생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젠 땅만 보고 다니지는 않아. 예전엔 다들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었는데 요즘은 벗고 다니는 사람들도 좀 있더라고. 사람들이랑 눈 마주치는 게 아직 어색하긴 하더라.     


외출제한이 풀린 기념으로 어제 낮에는 너랑 놀았던 놀이터에 갔었어. 거기에 벤치가 다시 생겼더라고. 작년부터 벤치에 누워서 하늘 구경 좀 맘껏 하고 싶었거든.


5분쯤 누워있었을까? 사람 발소리가 들리길래 나도 모르게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켜 벤치에 앉았어. 누군가 보니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왔더라고. 사람을 마주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입도 몸도 굳어 그 여자앨 빤히 쳐다보기만 했어. 인사라도 할까 싶어 입술만 달싹거렸지.     


“뭘 봐, 이 미친 새끼야. 그 벤치가 네 거야? 생긴 것도 뭐 같이 생긴 게 아침부터 기분 잡치게 뭘 그렇게 쳐다봐. 눈 깔아 임마. 내가 거기 앉을 거야. 비켜, 얼굴 다 긁어버리기 전에.”     


멍하니 자기를 쳐다보던 나에게 그 여자애가 한 말이었어. 그 여자애 아빠는 딸을 쳐다보더니 씨익 웃음만 지어 보이더라. 나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어. 뭐라고 맞받아 쳐야 할까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입고 있던 후드티만 뒤집어쓰고 집으로 뛰어 들어왔어.     


십중팔구 그 아이네 가족은 다 인격 테러범이겠지?

팔십 프로 정도의 인구가 인격 테러범이니 그럴 수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는데 아니라 마음이 착잡해.

끼적이며 편지를 쓰면 기분이 나아질까 했는데 아니네.

나는 네가 그리워. 내 기억 속 마지막 친구, 우인.

가면 갈수록 네 소식이 궁금해. 너, 정말 잘 지내고 있지?

뒤돌아보면 네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보고 싶고, 애틋해.

저녁 노을이 질 때면 우리의 마지막 바다 여행도 떠올라.

라디오에 우리 사연이 나와 신기했었지. 너도 기억할까?     


2082년 9월 9일 수요일


안녕,

지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