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를 떠난다. 그것이 내 목적지다.

카프카, <돌연한 출발)에서 비종결적 행위의 완정성 읽기

by 영일이

카프카의 짧은 글 속에서 만난 반가운 장면이다.

주인이 하인에게 “말을 끌어오라” 명령하지만 하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은 직접 마구간으로 들어가 말에 안장을 얹고, 트럼펫 소리가 들려오는 먼 곳으로 향한다. 하인은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모른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래야만 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노라.”

그는 행선지를 묻는 하인의 말에 구체적인 목적지를 모른다고 답한다. 마치 떠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듯이.


그러자 하인은 재차 묻는다.

“그렇다면 나리의 목적지를 알고 계시는 거지요?”

그는 답한다.

“그렇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라고 했으렷다. 그것이 나의 목적지이니라.”

이 글은 카프카 단편선을 묶어 낸 책 <돌연한 출발> 중 ‘돌연한 출발’의 일부다.

인생이 끊임없는 여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언제고 다다르게 될 종착점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곤 한다.


그 흐릿한 안개 너머를 바라보며 ‘그저 지금 서 있는 여기에서 멀겠거니’, ‘오래 걸리겠거니’ 하면서.
이와 같은 막연함은 내게 미지의 설레임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불안함을 안겨준다.

그러나 소설 속 나리는 불확실함 앞에서조차 단호하다. 그리고 그의 단호함은 내가 상상하던 ‘목적’의 이미지를 흔들어 놓았다.

내게 목적은 항상 한 점에 수렴하거나 한 폭에 담긴 완성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을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행위’로서 바라봤다.
그렇기에 떠남 자체가 이미 목적이자 도착인 행위로서, 그는 떠나는 순간 이미 목적을 달성해버린다.

어디로 갈진 몰라도, 떠남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미 ‘어딘가’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떠나기는 ‘비종결적 행위’다.


‘비종결적 행위’란 최종 상태를 목표로 하지 않는 행위들을 말한다. 예로 걷기나 생각하기, 사랑하기가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끝이 없다.

언제든 멈출 순 있어도, 남김없이 모두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밥 먹기도 비종결적 행위다. 오늘 먹었다고 평생 다 먹은 건 아니지만, 오늘 밥을 먹었다면 그 행위는 이미 완정하다.


이처럼 ‘비종결적 행위’는 행하는 순간 이미 이뤄진 것이 된다. 소설 속 나리가 떠나는 순간 목적을 이룬 것과 같이 과거나 미래가 그 사실을 바꿀 순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사는 일 역시 비종결적 행위라고 보았다.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면 그것은 곧 배움을 완료하지 않은 것이고, 치유가 되는 중이라면 그건 곧 아직 치유가 되지 않은 것이다(종결적 행위). 그러나 잘 살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산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소설 속 나리는 양식을 챙겨가지 않냐는 하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여행이 워낙 길 터이니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양식을 마련해 가 봐야 양식이 내 몸을 구하지는 못하지.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야말로 다시없는 정말 굉장한 여행이란 것이다.”

새삼 매 순간 나는 목적을 이룬 삶을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이미 ‘어딘가에 다다른 사람’으로서 걷고 있었다.

떠남은 도착이고,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이다.
비종결적이라는 것은 미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끝없이 현재 속에서 완정해지는 방식이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거대한 미완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가 밟는 발걸음마다 완성되는 연속된 현재다.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 속 나리처럼, 우리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로 길을 떠나지만, 그 떠남이 곧 목적이고, 그 순간이 곧 도착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종착점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여행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서 충만한 여행이 된다.


‘다시없는 정말 굉장한 여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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