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남는 건 엉터리 뿐

by 영일이

소나기가 내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에게 연락해야한다.


고막을 때리는 빗소리에 일순 세상이 정지한 듯 얼어붙고. 머릿속을 가득 매우고 있던 오늘의 할 일들과 감정들이 새찬 비와 함께 모조리 씻겨 내려갈 때까지, 나는 내리는 소나기를 본다.


그리고 그때 놀라운 일이 생긴다. 텅 빈 머릿속에 비가 만들어준 아주 짧은 틈이 생겨난다. 비로소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열린다.


업무와 불안, 다이어트 따위에 밀려 잊고 있던 이름들. 나는 그 열린 틈 사이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에게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건다.

가끔 운이 좋으면 무지개가 걸린다. 놓쳤다 해도 괜찮다. 어딘가에서는 분명 떠 있었을 테니까.

이처럼 내겐 소중한 엉터리들이 있다. 엉터리라는 단어를 쓰는 건 그냥 그 단어의 어감이 귀여워서.


여름밤은 해가 길어지니 자주 산책을 나서야 한다. 제 온 몸을 태양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피부를 뚫고 나를 통째로 익혀버릴 듯한 열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 차들과 사람들의 다리.


그리고 여름의 바람은 여기에 있다. 흘러내리다 못해 쏟아지는 땀을 훑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가는 바람. 그 어떤 바람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거기에 있다.


무엇보다 여름에는 놓쳐선 안 될 공연이 있다. 매미는 노련한 가수다. 그는 이 계절을 위해 그 짧은 생 전부를 불살라 노래한다. 그 노랫소리 앞에 인간의 팔십 년은 초라하다.

겨울에는 온기를 배운다. 꽁꽁 언 손을 핫팩에 가져다대고, 그 손을 다시 누군가와 나눌 때. 사람의 체온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지 깨닫는다.


눈이 오는 날엔 뜨거운 핫초코가 든 머그잔을 두 손에 꼭 쥔 채로 창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나는 핫초코를 좋아하지 않아 마시진 않는다. 다만 창문을 타고 드는 냉기를 맞으며,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의 사치를 오래도록 누린다. 내겐 진짜 초콜릿보다도 단 순간이다.


수많은 엉터리들은 여전히 계절의 틈새마다, 사물과 사람과 사건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낙엽 하나에도 펄쩍 뛰고, 안개 낀 날엔 늑대처럼 울부짖을 거다.

끝내 남는 건 엉터리뿐이다. 그리고 나를 버티게 하는 것도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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