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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Sep 14. 2024

할머니! 또 만나요, 우리.

육을 떠나 영의 세계로 가신 할머니

친할머니께서 101년을 사시고 2024년 9월 11일에 떠나셨습니다. 저로서는 머리에 피가 마르고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입니다.


할머니께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많지 않지만 할머니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셨는지 할머니의 온기가 제 삶 가운데 늘 함께 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헤집어 어떻게든 할머니와 관련된 기억을 찾아봅니다. 저는 엄마한테 혼나고 있고, 할머니는 엄마를 말리십니다. 할머니가 팬에 마가린을 두르고 토스트를 해주십니다. 한 겨울에 자전거를 씽씽 타고 돌아오면 꽁꽁 얼어 벌게진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남아있는 기억이 많지 않군요. 슬프지만 그래도 이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느껴져 다행입니다.


할머니는 거의 일평생을 건강하게 사셨는데 100세에 가까워지시면서 신체의 기능들이 하나둘씩 고장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집은 마당이 있는 전형적인 옛날 집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떠나갈 때 늘 대문 밖까지 한참을 나와 배웅해 주셨는데 어느 해에는 대문까지, 어느 해에는 현관까지밖에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 최근에는 침상에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시곤 하셨지요. 다 고장 난 몸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시는 할머니를 허름한 집에 홀로이 두고 도망치듯 떠난 여러 날들이 기억납니다. 도리를 다 한다고 했지만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는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사랑해 드릴 걸,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낼 걸 후회만 남은 오늘입니다.


사실 저에게 '죽음'이란 '탄생'과도 같은 축복할 일입니다. 어떠한 시작은 어떠한 것의 끝이며, 어떠한 끝은 어떠한 것의 시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여겼습니다. 경험적이지는 않지만 지혜로 깨달았다고 우쭐했습니다. 다 고장 난 육체를 가지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시는 할머니가 그 몹쓸 육을 떠나 영의 세계로 가시면 훨씬 더 편해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시더라도 제 마음속에서 늘 함께 살아가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과연 슬플까 궁금했습니다. 아내를 잃고도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며 노래하고 춤을 춘 장자처럼 나 또한 그리 할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으로 들었을 때 슬펐던 건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자식의 슬픔이 수화기 너머로 온전히 전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으셨고 저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와이프가 간단한 요기를 준비해 줘 식탁에서 그것을 입에 꾸역꾸역 넣는데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생전에 하늘이를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사촌 동생이 얼마 전에 하늘이의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드렸는데 그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머리로는 할머니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도 자꾸만 눈물이 삐져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분명히 편안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시는 그 포근한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다시는 그 따듯한 손길을 느낄 수 없고, 다시는 그 사랑 가득한 두 눈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그러니 이 눈물은 할머니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불쌍한 나 자신에 대한 눈물인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리 편안하게 가셨다고 한들 죽음은 죽음입니다. 하루아침에 누군가는 어머니를 잃었고, 누구는 할머니를 잃었고, 누구는 친구를 잃었습니다. 슬픔이 가득 메운 장례식장의 공기가 무거웠습니다.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저는 자꾸만 할머니가 보고 싶어 져서 멀쩡하게 웃다가도 갑자기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유난히 애처로워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9월 11일에 할머니를 뵈러 갈 계획이었습니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하시기는 하셨지만 분명히 회복 중이라고 들었기에 아버지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9월 11일 아침 일찍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뵈러 갈 채비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말입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설움에, 죄책감에, 미안함에 장례식 내내 너무나도 힘들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장례식에서 자꾸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세월의 바람을 맞아 작아진 아버지가 더 작아 보였습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가녀린 아이가 되어있었습니다.


입관이라는 절차에도 처음 참석해 봤습니다. 그저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영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곱게 감은 두 눈이 다시 뜨일 일은 절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화장터에도 처음 가봤습니다. 할머니의 육을 다 태우고 남은 뼛조각이 차디찬 분쇄기 속에서 불쾌한 소리를 내며 갈렸습니다.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끝이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할머니는 한 줌 뼛가루가 되어 단지에 담겼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삶이 그렇게 단지 안에 봉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진정으로 위대한 삶을 사셨습니다. 5남매를 두셨고, 11명의 손주와 12명의 증손주를 보셨습니다.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입니다. 할머니라고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탓에 여러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은 대체로 화목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가족을 다시 한번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한때는 가문의 중심이 되어주신 할머니가 안 계시면 가족들이 다 모일 일이 있으려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을 치르며 서로의 어깨와 가슴을 내어주며 온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이것이 다 기우이다 싶습니다. 



후회, 미안함, 죄책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던져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 하나만 두렵니다. 할머니가 유족에게 바라는 것도 그것 하나뿐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어제는 눈물로 만났지만 내일은 웃음으로 만날 것을 기대해 봅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할머니! 또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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