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으로부터 튕겨져 나간 짧은 생각들>
1. 은밀한 완성에 관하여… (그림을 그리다가.)
나는 내가 어째서 그림과 글을 여기 온라인상에 올리는지에 대하여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보통은 완성을 향한 최종단계로서 ‘작업물을 대중에게 전시하는 행위’까지 규정했었기 때문에 온라인이나 또는 그 누군가에게 보임으로써 작업물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홀로 그린, 그 어느 곳에도 전시되지 않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그림이나 글 조차 완성이라 규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끝내 타인에게 관람되지 못한 작업물이 가질 수밖에 없는 허무함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2. 환유적 혐오
혐오는 환유된다. 아니, 끊임없이 환유를 시도한다.
유대민족은 예수에게로..
나치는 유대인에게로..
민주주의 국가는 공산주의에게로..
국가는 반 국가세력에게로..
근자에 어느 위정자가 줄기차게 외쳐대는 것과는 정반대로, 전체주의는 민중에게 고루 퍼져있는 방식으로 은밀하다. 그런 점에서 과연 나는 당신을, 그리고 당신은 나를.. 언젠가는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3. 육신과 의식 그리고 존재의 알레고리
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에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을 보았다.
문득 드는 생각에 무덤이 화려한 이유는 그곳의 주인이 육신을 잃었기 때문에 그 심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주인의 공적과 이름이 각인된 한없이 무거운 비석을 깊숙이 박아두는 이유는 비존재가 되어 금방이라도 날아갈듯한 주인의 의식을 구류하기 위한 구속구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할당된 이 육신은 비존재로부터 존재를 구분 짓는 존재적 알레고리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한 나의 육신을 관찰하고 있는 이 의식은 육신이 사라질 때 동시에 소멸하는 불가분의 것이라면 어떻게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도 가능할까?
4. 무지의 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몰랐다는 건, 그것을 알기 전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름에 대한 인식은 앎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일 게다.
가령 없다는 것을 내가 선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무엇이 없는지 우선 인식한 후부터 그것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데,
말인즉슨 내가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대상의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선제적인 지식을 갖고 것이기도 하겠다.
그런 점에서부터 ‘지적 모름’ 또는 ‘지적 무지’라는 말이 떠오른다.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 나에게 기초적으로 주어진 앎이 사방에 널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수많은 지식이나 사건들 가운데 개별적으로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부터는 모르는 영역인지를 세심히 구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시기라는 방증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온갖 사건에, 온갖 댓글들이 난무하며 헐뜯고 혐오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과연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어디부터 모르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을까?
문득 어떤 책의 저자가 말했던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교양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그런 날이다.
5. 감정의 형식
슬픔의 형식을 갖춘 행복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또한 밝음의 형식을 갖춘 슬픔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슬픈 표정을 짓거나, 밝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금세 위의 명제를 망각하며 그가 자신의 현실에 불만족스러워하고 있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만다.
그가 웃고 있다고…, 그가 웃고 있지 않다고 하여 내가 그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타인에 취약하다.
6. 강박적 선량함의 위험
주변 사람 중에 착하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이 더러 있다.
이들은 분명 선천적으로는 선한 사람일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천성이 현실과 맞닿을 때 역효과가 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었다.
현실에서는 타인에게 일정한 피해를 주게 되더라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자신에게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차례가 부여됐음에도,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걱정에 결국 선택을 하지 않게 되면 결국 그 선택은 또 다른 타인에게 전가되어 그 선택을 대신 짊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이런 이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을 사용하여 피해를 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