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향해 썼지만, 아무도 읽지 않을 글>
“너의 글은 잘난 척하는 느낌이 나” 친구가 말했다.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라,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지만, 뉘앙스는 그러하다.)
생소했다. 사실 글을 쓰는 것에 있어 누군가의 평가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친구의 말이 생소한 것이 아니라, 나의 글이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그 자체가 생소했다.
사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글을 왜 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느낌을 가지고 글을 쓰는지에 대하여 정리해보고 싶긴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분명 언제나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본질적으로 내가 그것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상황이 주어진 대로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체 누구를 알고, 어떤 이를 위하며, 어느 누가 나를 알고 있어서 글을 쓰는 걸까. 게다가 혼자 조용히 메모장에 적어두면 될 것을, 나는 어째서 불편하게 회원가입까지 해가며 이렇게 공개된 장소를 찾아 글을 쓰고 있는가. 혹시 친구가 말한 ‘잘난 척’에 근거하기 때문일까?
여하간 내 글은 ‘잘난 척’도,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미천한 지적 수준으로는 잘난 척할 수도 없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친구가 던진 한마디는 분명 “나는 어째서 여기에 글을 쓰는가”라는 문답에 대한 명분으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참에 여기에 적어둔다.
나는 왜 글을 쓰며, 어째서 공개된 장소를 택했는가.
사실 내 글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느낌으로 읽힐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인터넷상에 글을 올리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일편의 감각에 가까운 느낌에 불과할 뿐, 진정 글을 쓰는 이유를 말해 본다면 깨어있는 매 순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지만, 결국 타버린 종잇조각처럼 바스러지듯 소멸해 버리는 ‘생각’들을 문자로 포획하여 박제해 둠으로써, 언젠가 생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라는 존재가 끝내 살아야만 했던 근거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예감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쓴 글들은 특정한 누군가에 겨냥되지 않는 글이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듯, 다시 말해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사용하여 쓰지않고, 다수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의 형식을 갖춘 이유는, 당연히 나의 내면적 사고체계가 사회적 언어로써 구성되어 있고, 언어라는 체계의 본질적 구성은 타인에게 의사전달을 위한 논리형식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비록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언어체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논리구조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누구도 읽거나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언어의 규정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언어가 아닌 혼자만의 ‘지저귐’ 등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내가 책이나, 영화 등을 보고 그동안 남겼던 후기에 본편의 줄거리를 가능하면 적지 않으려는 이유가 비로소 아무에게도 겨냥되지 않는 글이라는 간증적 근거가 될 수는 있겠다.
이미 내가 본 책이나 영화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어디에든 동일한 원본으로서 존재하므로, 구태여 다시 한번 친절하게 글로써 재현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받아들인 원본 데이터에 대해 내부적 사고를 거치고 난 출력값만을 글로써 적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럼에도 왜 공개된 곳에 글을 쓰는가”라는 물음이 발생한다.
사실 이것과 비슷한 의문이 과거에도 든 적이 있었다. “그림의 완성은 어디까지일까”에 관한 글을 쓰며, 나름대로 완성을 규정해 보려 시도하면서 지금과 유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림의 완성으로서 마지막 단계를 ‘공개된 장소에 전시하는 행위’까지를 범주로 규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이 있다.
당시 그림의 완성으로서 마지막 단계가 ‘공개된 장소에의 전시’였던 이유가, 지금 내가 공개된 장소에 글을 쓰는 이유와도 일치한다고 생각하는데..
공개된 장소에 자신의 창작물을 전시함으로써 누군가 내 글과 그림을 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상업적 이유가 아니라면) 진정 중요한 것은 누군가 내 글과 그림을 볼 수 있음을 ‘내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등장한 ‘코기토’ 명제를 들어본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명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닌,“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라고 해야 할까?
즉,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나의 글과 그림을 누군가 볼 수도 있음을 내가 '인식'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분명 구별되는 지점이고, 일종의 ‘확장성’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자유’와 ‘자유의지’가 구별되듯이,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가 보장되는 ‘나’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나'는 일종의 ‘정신적 주체’를 넘어 ‘감각적 주체’로 나아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글과 그림을 누군가 볼 수 있음 그 자체를 스스로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의 열린 세계관을 갖는 것이며, 진화적 측면에서도 동종 교배가 아닌 이종 교배로서의 열린 가능성일 것이다.
또한 동일한 글을 오직 혼자만 볼 수 있는 일기장에 기록한 것과, 불특정 다수가 볼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 기록된 것은 ‘동질이상’적인 것으로서 적힌 글의 내용은 동일하나 놓인 위치의 높이에 따라 담지된 에너지의 퍼텐셜이 다르듯, 서로 다른 중량감을 획득함으로써 엄연히 구별가능한 것이 된다.
따라서 내가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위에 서술한 이유로써 공개와 비공개의 선택지 중 개인적 신념(끌림)에 따라 최종적으로는 공개된 공간에서 글쓰기를 택한 것이다.
나는 '잘난 척' 하는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내가 글을 쓰는 데에는 잘난 척하는 목적도 혼재되어 있을까?
여기서 우선 정의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나는 잘난 척할만한 지식이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엔 없는 방향성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 브런치만 해도 다른 분들의 글을 잠시만 둘러보아도 지식적으로 충만함이 넘쳐 보이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무지와 오류로 인해 지적을 받을까 노심초사했던 기억들이 대부분의 기억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잘난 척’이라는 단어만큼은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잘난 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바로 생각나는 예를 들어보자면, 가령 외출을 하기 위해 집에서 옷을 고른다. 분명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서 가장 괜찮을 옷을 고를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이상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상한 옷을 골라 입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당연히 낮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들이 보기에 좋은 옷을 골라 입는 행위는 잘난 척에 포함되는 것일까? 가장 잘 보일만한 옷을 입은 목적에는 개인적인 만족도 있겠지만, 타인에게 잘나 보이기 위함도 맞지 않는가?
미를 추구하는 것, 그것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잘난 척하는 게 맞다."
개인적으로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좋아하는데, 영화 속 대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금자가 감방 동료로부터 사제 총 제작을 의뢰하는 장면인데, 그저 한 번의 복수를 위한 총일뿐인데도 불구하고 금자는 비효율적이면서도 화려한 장식을 요구한다. 그런 금자를 보고 감방 동료는 이런 말을 한다.
“야, 이런 건 뭐 하러, 후련하게 잘 쏴지면 그만 아니냐?”
이에 금자는 이렇게 답한다.
“뭐든지 예뻐야 해, 뭐든지 예쁜 게 좋아.”
금자가 했던 말처럼, 나는 어릴 적 혼자 골방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도 소년 만화가 아닌, 미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변신하는 만화를 보면서, 그 특유의 미학에 빠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전반적인 내 삶과 주변에 놓인 사물에 대해 습관적으로 미학적 잣대를 들이대며 관찰하기 위해 힘을 들였다.
저것은 왜 아름다운가, 그것은 어디가 예쁜가, 이 물체, 저 인물의 언어, 그리고 행동에는 어떤 미학을 담고 있는가.
물론 내가 가진 미학이 인류가 공통으로 공유할 만한 그런 보편을 떠나서, 그저 한 개인의 천성적인 습성이라 해야 할까?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미학적인 시각을 가다듬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내면화되어있다고 스스로 느낀다. 그렇다 보니 글을 쓸 때도 여지없이 이 상황에서는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발음이 더 좋게 읽힐지,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글의 표현이 더 보기 좋게 읽힐지, 단어의 뜻은 정교한지(정교한 미학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등을 고려한다. (안타까운 건 그토록 나름대로 ‘미’를 고려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보편적인 수준의 글로 쓰이진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내 실력은 그 수준이 것이다.)
그렇다 보니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다가도 맘에 드는 단어를 수집하고, 글을 쓸 때 수집한 단어들이 정위치에 맞게 쓰여서 뜻이 명쾌하게 통하는지 등, 나름대로 미학적 고려는 열심히 하는데,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글이 중언부언되거나,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뜨려 글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쨌든 요점은 미학을 추구하려는 것이 잘난 척이라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잘난 척하는 게 맞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방점은 ‘척’에 있는 듯하다. ‘척’이라 함은 없음에도 있는 것으로 스스로 간주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해서 무엇인가를 속인다는 것인데, 우선 속여야 하는 대상을 특정해 보면, 내가 그동안 여기저기 쓴 글은 부분공개/전체공개이므로 적어도 둘 이상은 속여야 한다. 한 명은 나 자신이고, 두 명째부터는 나를 제외한 타인들이 될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보면 나는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스스로 지껄이는 말이 얼마나 신뢰성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속여 권위나, 위상을 차지하는 행위는 우선 메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그런 것으로 타인을 속이려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시시해지는 것을 참기 어렵다.
차라리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면 그냥 온전히 나의 존재가 놓여 있을 텐데,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척하려는 순간, 갖지 않음을 아는 내 본질적 자아가 나를 바라보게 되면서, 나 자신이 처참하게 시시해진다. 나는 그 순간을 참아내기가 좀처럼 어렵다.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그런 ‘척’ 해야 하는 순간이 있음을 알고, 그 순간을 참아내지 못하면 오히려 삶이 피곤해지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여하간 실제의 '나'와, ‘척’하는 '나'의 간극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존재의 시시함을 참아내야 할 고통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본다면 "나는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이 나를 ‘척’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면, 그건 그 사람 나름대로 판단 기준이 있을 것이므로 그를 존중하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현학적’인 부분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또는 자신이 하는 그 어떤 일이 되었든 현학적인 것은 분명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즐겁게 복무하도록 하나의 명분이 되어주고, 활력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어, 현재 그리고 있는 그림이 남들에게 뽐낼 정도로 잘 그려지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적어도 내 판단에 있어서는 이상할 것은 없다. 물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글을 남들이 읽을 때, 내 글로써 내가 좋은 기억으로 남거나, 조금이라도 더 인상적이게 보이도록 쓰고 싶은 것이 당연한 사람의 마음 아닐까? 그 누가 됐든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 마음 자체가 부정당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이 흐름에서 말해보자면, " 나는 ‘잘난 척’ 하는 것이 맞다."
이런저런 예를 들었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잘난 척’은 쉽게 넘길 말이 아닌, 조금이라도 정교하게 규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 보니 조금 힘을 들이게 된 듯하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고, 이렇게나마 글을 쓰는 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갈라파고스화 되어버린 생각들을 비로소 하나의 대륙으로 뭉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글쓰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아무에게도 겨냥되지 않는 그저 내면의 고백과도 같은 독백의 형식으로 쓰인 공허한 글이지만, 이것은 공개되어 있는 장소에 쓰인 글로서 반대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쓰인 글이 되고, 언어라는 속성 상 전달과 소통의 형식을 갖춤으로써, "이 글은 모두를 향해 썼지만 아무도 읽지 않을.." 그런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