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음으로부터 그리움은 말해진다.>
문득 넷플릭스에 볼만한 영화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최근 인기 있던 '서울의 봄'이나, 노량, 오펜하이머…. 등 놓친 영화들 투성이었지만, 결국 고른 것은 옛 영화 ‘조제’였다.
한국에서 리메이크 한 ‘조제’를 보고나니, 원작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까지 다시 찾아서 보게 되었다. 국가와 언어는 달라도 당연하겠지만 두 영화 모두 하나의 심상을 간직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
우리가 간혹 삶을 되돌아 보면서 서글픈 감정을 느끼는 건, 삶은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비가역적인 것이고, 그 관류 속에서 영화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모든 것들에 깃든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일상 속에서 작동했을 때 어떤 현상으로 드러나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움
그리움은 무엇인가. 그리움은 무엇에 기반하는가.
우리가 다름에 대해 이끌리고 기대하는 이유는 이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언젠가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기대'라는 건, 그리움의 다른 발음일 게다.
나는,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신이라는 중력에 고착되어 살아간다.
조제가 츠네오를 만나게 된 것처럼 우리가 타인을 만나고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건, 그것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중력으로부터 이탈되는 역학이라는 것을 마치 본능처럼 알기에...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열고 늘 새로움에 기대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기대’라는 언어를 다른 단어로 바꿔본다면 ‘그리움’이 될 것이고, 우리는 늘 기대를 그리워하다 또다시 한 페이지의 삶을 넘기는 것이다.
츠네오가 조제를 좋아하고, 조제가 츠네오에게 기대게 된 것은..
알수없는 감정으로부터 서로의 중력에 이끌린 나머지, 자신의 행성으로부터 잠시 부유하거나 어쩌면 마침내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여 서로의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결국 그런 이탈의 끝은 언젠가 자신의 궤도로 되돌아와야만할 것이라는 기정 사실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예감처럼 인지할 때 발생하는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그리움과 동시에 발생하고 기능하는 자웅동체와도 같다.
거짓과 진실의 역학
조제는 자신이 내건 ‘조제’라는 거짓된 이름을 진실처럼 늘어놓고, 자신이 놓인 현실과 괴리된 언어만을 흩뿌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장 현실에 기반한 거짓이다.
조제의 입술로부터 이탈되는 언어들이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수록 그녀의 현실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임을 오히려 증명하는 것이고, 그녀는 거짓으로써 진실을 말하며 그 행위 또한 자신의 중력 너머 이계를 갈망하는 그리움의 발현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과연 거짓과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쩌면, 가장 간절한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거짓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대책없이 간절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거짓이야말로 바로 진실을 머금은 단면일 것이며, 진실을 말하기 위한 간절한 방식으로써 거짓을 발설한다.
"평생 내 곁에 있어줘" 말처럼, 사실은 그가 평생 내 곁에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
진심을 고이 접어, 거짓의 행간에 담는다.
조제는 츠네오가 떠날 것이라는 예민한 현실 감각을 가진 인물로서 언젠가는 츠네오가 자신의 중력을 되찾아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궤도를 이탈하여 츠네오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일 게다.
그 지점에서 조제를 바라본다면, 작은 다락 속에 엎드려 공상만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언어는 사실 그 어느 현실보다 실제에 가깝다.
업사이드 다운
츠네오는 언제나 현실에 기반한 언어만을 발화하며 현실에 철저히 수감된 채 살아간다.
반면 조제는 다락 속에 들어앉아 현실 너머의 상상계 만을 말하고, 유모차 속에서.. 그리고 언제나 츠네오의 등에 업힌 채 현실이라는 지면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이 영화가 서글픈 이유는 현실과 유리된 조제에게 작용하는 상상계의 중력, 그리고 그런 조제의 상상계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현실이라는 츠네오의 행성이 가진 또 다른 중력장의 작용으로 끝내 서로의 행성에 발 딛을 수 없었기에 쏟아져내린 그리움…
서로를 향한 그들의 그리움은 마치 영화 ‘업사이드 다운’과도 같은 천연의 그리움이다.
시간 속에서 나는, 과연 나와 같은가.
잠시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여 서로의 중력 속에 여행하고 돌아왔지만..,
본래의 자리로 귀환한 나는(조제와 츠네오는...) 이전의 나와 과연 동일한 나인가, 정녕 제자리에 돌아온 내가 맞는가.
떠나가기 전과 모든것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형태만 같을 뿐.
가령 다시 앉은 이 자리가 불과 10분 전 그리고 20분 전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어적 규정부터가 다른 ’10분 전의 자리’ 그리고 ‘20분 전의 자리'는 이미 시간적으로 좌표가 다르며, 이후로 나는 '1분 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 그리고 '5분 후의 자리'에 앉은 내가 되어 매 순간 또다른 나를 갱신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멈출 수 없고,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나면 그전으로 역행 수 없이 끝없이 흘러가야만 하는 비가역적 그런 것.
그런 역학의 공식으로 이 영화를 규정해 본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영화는 각각 고유한 중력을 가진 서로 다른 두 행성에 떨어져 사는 인물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로의 중력을 향해 잠시 이탈했던..,
또한 그 이탈의 과정 속에서 흐르는 시간이라는 역학이 그들의 삶을 그토록 서글프게 하는지를...
결국 서로가 가진 중력의 이질감을 감당할 수 없기에, 다시 본래의 중력으로 돌아온 자가, 돌아오기 전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그런 시공간에 관한 영화였다고..
익숙한 자신의 행성을 걷다, 불현듯 길가에 무너져 울음을 터뜨리는 츠네오의 마음이 바로 그런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