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사랑한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겠어요. -괴테->
포스트 트루스
대안적 사실, 이른바 진실은 찾아지는 것인가?
완전한 사실과 그것에 입각한 무결한 진실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더라.
가령 하나의 사실로서 사건이 광장에서 발생했을 때, 진실은 광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존재하고, 성긴 진실들 사이로 간혹 비쳐 보이는 사실은 그저 누군가의 도구로써 거기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실'은 그 자체로 놓여있는 것이 아닌 주장되는 것이 되어버리고, 필요한 만큼만 이데아로부터 요청되어 랜선을 타고 모두에게로 흘러간다.
그런 점에서 사실은, 사실 판타지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회사의 팀장에게 습관이 되어버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이 문장은 문장 자체가 가진 거친 질감처럼, 상당히 강력한 주술적 힘을 가졌다.
이 문장처럼 특정 언어가 습관이 되는 이유로는 대체로 많은 상황에서 대입하기 쉽고, 타인에 대한 영향력/지배력이 큰 경우, 다시 말해 발화자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담지한 언어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습관화되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런 언어일수록 더욱 경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꼰대가 되어 있거나, 대화의 주제의 본질을 흐리거나, 더 나쁘게는 존재의 가치를 폄하한다.
‘양화논리’라는 개념이 있다. 말 그대로 대상의 존재론적 가치, 질적 가치 배제하고 양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는 논리인데, 예컨대 한 부모의 소중한 자녀가 군에 입대하여 ‘병사1,2,3,4.... n'으로 변환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팀장이 주창하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는 소문처럼 그의 입으로부터 질리도록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분석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말이 바로 양화논리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까놓고 말하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엔 대상의 본질을 다루는 듯 하지만, 그 속내는 대상을 해체하는 행위 자체가 가치의 본질을 파악하는 근거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서로의 패를 깠으니 이후부터는 동일한 가치를 매기는 논리인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나 엉성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대상을 해체하여 본질을 읽어내야만 제대로 된 인식을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앞서 예를 들었던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가 군에 입대했다는 이유로 본래의 고유한 이름을 잃고 한낱 병사n이 되는 과정처럼, 처음부터 해체할 수 없는 존재를 무리하게 해체재조립 해버릴 경우 동시에 그 지점으로부터 폭력성도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라는 문장은 존재의 가치를 폄하하고 개인의 고유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습관처럼 어느 때나 쉽사리 사용할만한 문장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이런 내 의도 따위와는 관계없이, 자본이 세상 대부분을 잠식한 작금의 시대에는 참으로 잘 작동하는 말이라는 거…
그런 이유로 문득 스쳐 지나갔던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에서 이런 글을 쓴들, 그것이 팀장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들은 시대의 거대한 관류에 맞춰 흘러가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