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주이상스>
산, 그 ‘세상의 기원’에서... (귀스타브 쿠르베)
어느 야산,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갈대숲을 헤치고 한 여성이 걸어 나온다.
마치 그녀는 지금 막 산으로부터 해산(解産)되어 세상을 처음 보거나, 어쩌면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며 두리번거리다, 불현듯 조금씩 몸이 흔들리고 그 몸짓은 이내 춤이거나, 아니면 춤과 비슷한 그 무엇이 되면서 하나의 기괴함이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녀의 춤은 내면에 쌓인 어떤 부정함을 털어내기 위한 살풀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그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일까.
아마도 이 글은 그녀의 춤을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이 될 것이다.
엄마는 존재하는가.
어릴 적 ‘씨받이’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던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TV를 보다가 어느 영화의 제목이라며 소개되었던 그 단어는 당시의 나에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생경한 발음만으로도 강렬했었고, 몇 살을 더 먹은 나중에서야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강렬했다.
지금 기억하건대 그 단어가 강렬했던 이유는 단어 그 자체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언어적 감수성으로 단어를 규정하는 능력은 없었겠지만, 오히려 어렸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엄마에 대한 절대적 숭상, 그리고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자기의식의 계발단계에서 부모라는 지위의 절대성을 가진 엄마가 아닌, 도구적 엄마로 취급하는 ‘씨받이’란 단어는 어린 나에게 그저 옛날이야기들처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대상을 도구화하는 행위는 반드시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이 포함된다.
인간에 대한 도구화 역시 같은 원리로써 주체적 명령을 내리는 지배자와 그 대척점에서 명령을 받는 피지배자의 관계로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보통 주인과 노예, 임금과 신하, 사장과 직원 등의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고전적 측면에서 권위적 남성과 여성 사이의 주종적인 관계성에서 드러나는 ‘주체는 어떻게 객체를 도구화하는가‘, 즉 여성은 어떻게 남성에게 도구화되어가는가. 그리고 그것을 넘어 여성은 어떻게 남성이 돼버리는가.라고 할 수 있다.
‘씨받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남성에게 여성은 사용된다. 즉 사용자가 남성인 시점에서 여성은 여성성이 삭제되어 한낱 도구화된 남성이라는 본질 아닌 본질만 남게 되는데, 영화는 그 상태에 이른 여성을 과연 근본적인 차원에서 엄마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남성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제시하지만 각 여성들은 성장 단계(나이)에 따라 남성화가 이루어진 진척도를 일종의 스펙트럼 분석표처럼 나열하여 표현한다.
그 근거로 남성화의 초기단계인 학생 미나(천우희 분)는 남성성(性)에 대한 호기심으로 왕성하다 못해 어쩌면 맹목적인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그 진행단계의 종착점에는 끝내 남성화가 완료된 인물로서 살해된 아정의 할머니(김진구 분)가 서 있다.
영화에서 아정의 할머니는 과거 흔하게 보았던 스테레오 타입의 남성적 행동양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언제나 술에 절어 가족을 등한시하고, 당시의 흔한 남성들처럼 한낮에도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다. 그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으로는 살해된 손녀의 장례식 도중임에도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난동을 부리며 주변에 막걸리를 뿌린다. 그 모습이 흡사 남성의 사정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녀가 앓던 치매는 단순한 기억의 퇴행이 아닌 자기상실, 즉 고유하고 본질적인 자아의 상실인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다양하지만 남성성으로 점철된 여성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남성화되어가는 단계 속에 ‘엄마’라는 역할이 종속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엄마는 진정 존재하는가?”
남자와 팔루스(phallus)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영화 ‘마더’는 앞서 말했듯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나열되는 것처럼, 남성 역시 동일한 편재 방식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일정하게 점철된 특성을 보이는데, 여성 성(性)에 대한 욕구와 동시에 오르가즘을 향한 욕망, 거기에 더해 지배적 권력욕이 추가된다.
영화는 그 모든 욕구와 욕망의 발원지로서 ‘팔루스’를 지목하는데, 팔루스는 일반적으로 ‘발기된 남근’, ‘남근상’ 즉 상징적, 숭배적 남근을 의미한다. 발기된 남근은 그 자체로 욕망성을 담지한 상태를 뜻하며 또한 오로지 감각에 의지한 채 욕망된 대상을 향해 무지성적인 직진성을 가진 상태이며, 과거부터 세계 여러 장소에 세워져 있거나, 역사적 사료에 기록된 남근상에 대한 정의는 그 자체로 권위적 상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질서화된 문화 속에 억압된 기호물로서 우회하여 표현된 것이며, 기표적인 언어 속에 은유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욕망의 표지다.
마더 영화 속에서 남성들은 이미 권위적 복종화가 공고해진 남성적 사회질서 속에서 성장하였고, 권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복제화가 이루어진 인물들로 표현된다.
다만 도준(원빈 분)은 발달장애로 인해 지적 성장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채 신체만 성숙한 인물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상호 모순적 특성을 가졌지만, 결국 사회의 압력 속에 남성화된 권위주의적 사회로 편입되어 버린다. 자신과 잘 놀아주는 진태(진구 분)와 어울리는 과정에서 엄마(김혜자 분)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남성성을 체험하고 점차 엄마와 남성을 구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팔루스적 성기를 가졌다는 인식마저 갖게 되면서 발생하는 우월적 특권의식과 동시에 엄마와 여성을 분리한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유아에게 엄마는 성별에 관계없는 충동적, 욕망적 대상이지만, 아이가 성장하여 기호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여성과 엄마를 구분하게 되고, 남성은 엄마를 향하는 성충동적 욕망이 금지되면서 그 욕망이 타 여성들을 향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질서 속에서도 성적 욕망은 여전히 근원적으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욕망은 억압 속에서 일종의 충동적인 분출, 즉 반사회적 성향을 띤 오르가즘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거나 저마다의 변칙성을 가진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는데, 도준은 그가 가진 고유의 모순성으로 인해 팔루스적 욕망이 극단적이고 뒤틀린 방식으로 분출됨과 동시에 장애로 인하여 무시당했던 남성성에 대한 격한 분노와 억압된 성적 욕망이 오르가즘성으로 분출되면서 급기야 살인을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무시하고 억압한 사회를 향해서 시위하듯 자신이 해쳤던 시신을 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전시해버리고 마는 도착적 상태에까지 이른다.
영화는 대표적 사례로서의 인물로 도준을 선택하여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 뒤틀림을 보여준 것이지만, 사실 도준 이외의 남성들 역시 각자만의 뒤틀린 팔루스로서 곳곳에서 욕망을 분출한다.
진태의 경우 스스로 젊고 강한 신체를 가진 남성성을 자각함으로써 나르시시즘적 팔루스를, 도준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의 경우 형사와 범인의 법적 우위관계로서의 권위적 팔루스를, 또한 도준의 엄마가 고용한 변호사는 직업적 우월성의 팔루스를, 그리고 권위적인 남성의 사회에서 밀려나 마을의 외진 곳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노인은 저 자신보다 더 약자를 찾아 성적욕구를 해결하는 비정하고 비겁한 팔루스로서 행위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은 예외 없이 각자만의 뒤틀린 팔루스를 상징하는데, 이는 곧 우리 사회 전반이 남성 편향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여성 친화적인 남성들도 그렇지 못한 남성들이 사이에 뒤엉켜있지만 사회 전체를 하나로 보았을 때 연산되는 평균점은 팔루스적인 힘의 지배에 기울어진 사회인 것이다.
도구, 스스로 도구화되는 여성 그리고 판옵티콘
영화의 초반 약재상을 운영하는 도준의 엄마는 ‘기다란’ 약재 묶음을 작두로 썰고 있다. 마치 자신조차도 눈치챌 수 없는 깊은 의식 속에서부터 팔루스를 혐오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도로 주변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들이 행여라도 다치치 않을까 하는 우려에 정신이 팔려 아들을 감시하다 결국 작두에 손가락이 베인다.
그녀의 상처는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하다 다친 것이지만, 결국 그 상처는 자신에 의해 입혀진 자해다.
인간의 역사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앞서 언급한 씨받이처럼 오랜시간 타인을 도구화하다 보면, 그 도구화의 종말은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남성의 재생산을 강요하고 그것을 수행해내지 못했을 때 자학하는 며느리와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징벌이 이루어지는 시어머니에 대한 드라마 속 상황은 사실 일상에서도 어렵게 않게 접할 수 있다.
마더에서도 이러한 상징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미선은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남자아이를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거나, 도준의 엄마는 그녀에게 돈을 빌리는 대가로써 ‘애 들어서는 약’을 지어주겠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신체 자체가 애를 낳는 기계나 도구들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며, 도준의 엄마가 언급하는 '기억을 잊게 해주는 침 자리’라는 것 역시 마치 버튼을 누르면 기억을 지우는 로봇처럼, 스스로를 기계화하는 상징일 것이다.
또한 여성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도 스스로 남성에 편향된 도덕을 공고히 하거나, 도준에게 바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드시 참지 말고 싸우라는 폭력적 도덕성을 엄마가 주입하거나, 자신의 아들이 살해한 아정의 장례식장에 제 발로 찾아가 '자신의 아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비장함에서 여성으로서 기꺼이 남성을 대변하고 희생하며 스스로를 억압적 상태에 놓여지도록 도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타인에 의한 도구화를 넘어 스스로를 감시하는 지경에 이른, 일종의 판옵티콘화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 전체에서 다른 의미로서의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단 한 장면이다.
아들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우연히 들른 외딴 고물상에서 도준의 엄마는 아들의 살인에 대한 구체적인 목격담을 듣게 된다. 유일한 목격자인 그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아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손상됨과 동시에 아들이 살인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결국 그녀는 이성을 잃고 분노하며 팔루스와도 같은 파이프렌치를 내리쳐 잔인하게 노인을 죽이고 만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정신을 차린 도준의 엄마가 폭력의 정점에 이른 그토록 경악스러운 자신과, 나의 손으로 죽인 시신을 보며 원초에 가까운 비명과 함께 외친 것은 ‘엄마’였다.
생각해보건대 존재하는 모든 극한의 두려움 끝에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자체를 극렬하게 부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이르게 되었을 때 유일하게 생각나고 숨어들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자신의 시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엄마의 자궁이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만이 부르는 엄마의 엄마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저 깊고 깊은 근원에 가까운 그런 엄마…..
고물상에서 도망 나온 도준의 엄마는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의 야산을 최초의 동물처럼 기어서 올라간다. 마치 엄마의 자궁 같은 그 야산 속에 들어가 그녀는 잠이 들었고, 얼마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잠에서 깨어난다.
그녀의 피 묻은 얼굴과 피 묻은 옷은 어째서인지 깨끗하다. 마치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처음 영화가 시작했던 그 장면이 또다시 펼쳐진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까. 아니면 또 한 번의 반복일까.
리플리 증후군, 그리고 엄마의 주이상스
형사로부터 진범이 잡혀 도준의 결백이 밝혀졌다는 말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들.
그녀는 되돌아온 아들과 여느 일상처럼 밥을 먹는다. 마치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아들의 결백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미 아들이 살인자였다는 진실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되살린 아정의 휴대폰에서 마주한 추악한 진실들은 이미 그녀 안에 은폐되어 있다. 휴대폰이 말해주는 진실은 자신이 알던 대부분의 남성들이 아정과의 성매매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형사와 고물상 노인 조차…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준의 엄마는 마치 아정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완전한 남성화가 완료되었거나, 자신의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웠거나, 어쩌면 반드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자신의 철없는 아들이 쥐어준 ‘침 통’으로 인해 당시의 기억이 또다시 상기됨으로써 그녀는 다시 한번 진실 속으로 소환된다.
그 혼란스러운 진실 속에서 엄마는 관광버스에 올랐고,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남성화된 여성들 속에 파묻혀 아들이 손수 찾아준 침 통을 열어 ‘기다랗고 뾰족한’ 침을 꺼낸다.
'오금쟁이 위로 다섯 치, 그리고 거기서 세치 반..."
허벅지 안 쪽, 사타구니로부터 팔루스의 끝 정도 되는 절묘한 거리…
나쁜 일, 끔찍한 일, 속병 나기 좋게 가슴에 꾹 맺힌 거 깨끗하게 풀어준다던 허벅지 안쪽의 그 침 자리를 찾아 엄마는 날카로운 침을 이내 밀어 넣는다.
그리고……
흔들리는 버스 안, 마치 졸음으로부터 깨어난 것처럼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가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깨어난 그녀는 마치 그 이전의 기억은 없었다는 듯이 춤을 추는 남성화된 여성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영화의 처음과도 같이.., 그리고 마치 히랍인 조르바가 춤을 추듯…
그녀의 춤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한 춤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추는 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성화된 사회의 오랜 억압에 짓눌려 온전하게 언어화되지 못한 원초적 여성성이, 끝내 춤이라는 기이한 현상으로 표출되어 버리고 만 '엄마의 주이상스’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