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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지원 Sep 25. 2024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셨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의 사랑하는  엄마가   갑자기 88년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 나라로  떠나셨다.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에 고등학교 갓 졸업한 아버지와 혼례를 치루고  말도 안돠 36세의 나이에  홀로 되셨다.


물건너 동네에 살던  곱디고운 울 엄니는

서울에 유학중이 었던 아버지 ,인물좋고 똑똑하기로 이름난 촌동네 개천의 용이었던  아버지를 만나 6남매를 낳았다.


집안에 귀하디 귀한 외동아들 아버지는

 서울 유학중 엄마와 결혼을 하였다. 아버지의 대한 기억은 자주 아파서 누워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아버지는 하늘로 일찍 갈거면서  자식들을 줄줄이 6명이나 남겨 놓으셨다?내가 10살이던해에13살,10살,7살,5살,3살 ,뱃속의 유복녀까지  그렇게 우리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엄마에겐  과부라는 멍애를 씌워 주고 떠나셨다. 




어릴적 너무 싫었던 "과부" 라는 단어,

정말 평생 내 입에 담지 않으려 했던 단어가

엄마가  떠나고 나니 오늘 떠오른다.



아버지의 병구환으로  망해 가는 집안을 바로 세우려 할아버지와 한 마음이 되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아비 없는 손주 들을 아버지를 대신하여 워주신  나의 할아버지도 정말 존경하는 분이시다. 덕분에

올망 졸망 6남매는 주변의 인정받는

반듯한 아이들로 잘 커주었다.


엄마는60에 뇌경색이  한번 왔었고


 그때는 엄마가 영영 못일어날줄 알았는데

우리 엄마 정신력 하나는  믿기지 않을만큼 강함으로 재기에 성공하신다. 기적이었다.

거의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할수 있을만큼  건강해 지셨다.




10년후 70에 다시 찾아온 뇌경색

이젠 오른쪽 마비로 손과 발이 불편하셨다.

그래도 늘 엄마는 불편한 몸으로 빨래도 하고 밭일도 꾸준히 하시며 몸을 움직이다보니

일상 생활이 가능 할정도로 회복이 되어갔다.



 우리 엄마는 강했다.

우리 엄마는 좌절하지 않았다.

두 번의 뇌경색으로 인해 거동은 좀 불편하셨지만 정신력과 의지력 하나로 여지껏  꾸준히 움직이시며  당신 건강을 잘 지켜 내셨다.





2년전 동생이 집도 새로 지어  엄마방도 새색시 방처럼 예쁘게 꾸며 놓았다.

새집으로 들어 가시고 너무 좋아 하셨는데 ...

작년  까지만 해도 말씀도 잘 하시고

식사도 손수 잘 챙기셨다. 올들어 많이 야위여 가신다 했는데 점점 입맛도 떨어지시고 잘 안드시니  걱정이 되었다.


장사를 해야 하는 나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만만하니 단백질 보충 음료만 택배로 보내 드렸다.주말에 찾아 뵈면 말수도 점점 줄어 들고 어눌해 보이셨다



 마음의 준비는 하였지만 조금 더 우리 곁에계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연락받고 달려갔을 땐 말씀은 못하시고  숨만 몰아 세우신다. 아직은 아닌데... 엄마 아직 아니야.. 엄마 하고 할예기가  아직 많은데..



3일 전 갔을 때도  자식들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하신다고 말씀하시며 

빨리  하늘나라 가야지 자식들 고생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엄마는 그렇게 삶의 마지막 끊을 놓으셨다.


휴대폰 앱으로 기도문을 틀어 주니

그것좀 계속 틀어 달라 했는데..




엄마가 없다는게  슬프고 황망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움과 고통 없이 편안히 하늘로 떠나시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 엄마 다움이라는 생각이든다.




주무시는 줄 알았다.

외삼촌과 이모가 오셔서 엄마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흐트러짐 없는 꼿꼿함으로 떠나실 병석에 오래 누워계시면 돌봐야 하는 자식들 힘들까 봐 조용히 떠나셨으리라 생각이든다.



조금 더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던 나의 엄마.

 엄마는 88세의 연세로 또렷하게 말씀도  잘 하시었는데  거동 못 하신지 일주일 정도 계시다 조용히 세상을 마무리하고 떠나셨다.



누워 계셔도 깔끔한 것을 원하신다. 생각 없이  갈아 입힌 흰면티가 누렇게 되어 있었다. 다른거  가져 오라는 말씀에 얼릉  쿠팡에서 흰면티 긴팔3장 반팔 3장을 주문했다. 우리엄마 2장밖에 못입고 떠나 셨다.



젊어서 홀로 되시고 우리 6남매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아내셨는지  내 어찌 엄마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엄마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셨.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다.한 번도 함께 사는 며느리를 탓한 적이 없다. 그저 덕 있는 얘기만 하는 분 이셨  늘 자식들을 위해 기도 하신던 우리 엄마!!!



 딸에게 살가운 말을 잘할 줄 모르는 엄마다. 나 또한 고스란히 배우고 그런 엄마가되었다. 네 딸 중에 어쩌면 엄마의 재주와 성격을 가장 많이 닮은 딸이 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자식이 많아서일까? 다른 자식보다 둘째인 나는 더 안중에도 없는 듯하여  시린 마음일 때가 많았다.첫째는 첫째라서 셋째 넷째는 아들이라 막내들은  막내라서 챙김을 한다.



욕심이  없는나

난 내 몫이 생기면  동생들에게 내 준다.

우리 엄마 눈에는 난 늘 풍족하고 씩씩한 딸로 보였나보다.


엄마 떠나시기 이틀 전 큰 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맏아들로서 끝까지 엄마를 본인이 책임지고 모시겠다고 했다. 힘들게 살아온  엄마이야기 하다보니 난  참 엄마에겐 녹녹한 딸은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ㅡ


 딸,딸, 아들,아들 ,딸,딸

둘째인 나는 어릴 적 종종 엄마에게 대들었고

요리한다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하지 말라는 재봉틀 해보겠다고 수시로 바늘 분질러 놓고  호기심 많은 딸은 사고뭉치 아니었을까 싶다.


이젠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엄마가  떠나시기 2틀전에  스스로 엄마에게  쌓였던 작은 앙금들을 스스로 털어 버렸다. 그래 내 탓이었어.몸에서 시원하게 무언가 날아 가는 이기분  좋음은 뭐지?  이것도 사랑이었어..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고단한 삶을 살아내신 나의 엄마~

마지막도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으니 위로가 된다.우리 삶의 마지막 바램처럼 엄마가 생각했던 마지막 모습으로 그렇게  떠나셨다.


하느님을 믿는 엄마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도  엄마 다웠다.너무 편안한 얼굴이셨다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마 하느님도 만나고 아버지고 만나고

그동안 고마웠어요.엄마 천국에서는 많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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