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0살에 다시 태어나 꿈을 그려본다

암은 나에게 온 선물

by 은빛지원

암을 이겨낸 내가 다시 꺼낸 인생 2막의 꿈 이야기


늦지 않았어~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꿈? 다시 그려보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에겐 입만 열면 지적부터 하는 남편이 있다. 이젠 성인이 된 딸 둘, 아들 하나, 삼 남매가 있고 사위도 생기고, 사랑스런 손자도 생겼다.

살림만 하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시부모님을 13년간 모셨던 시간들. 아, 생각조차 하기 싫은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쥐꼬리인지, 코딱지인지 모를 돈을 벌어다 주며 큰소리치는 남편 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온갖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 학원 하나 보내려고 해도 남편 눈치를 봐야 했고, “때려치워라”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다.마흔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나는 결심했다. 학원비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51세. 살림만 하던 주부였던 내가, 장사를 하겠다고 반찬가게를 열었다. 장사는 해본 적 없고, 업소용 조리도구 하나 다룰 줄 몰랐지만, 그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한다는 즐거움으로 큰 판을 벌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내게 말했다. “넌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어.” 무엇이든 시작하면 죽을힘을 다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시부모님 밑에서 숨죽이며 귀머거리, 벙어리처럼 무기력하게 살아왔던 나.

분노조절을 못 하는 남편의 돌발 행동에도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아이들을 지켜야 하기에 나는 늘 방패가 되어야 했다. 그런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 판을 벌이니 비로소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기가 솟았다. ‘까짓 거, 못할 것도 없지!’ ‘망하면 세상 공부하는 데 돈 좀 썼다고 생각하지 뭐.’ 남편에겐 ‘배 째라 는 마음이었다. 지가 어쩔 건데?! 쫄지 말자. 세상과 한판 붙어보자! ‘넌 할 수 있어!’ 스스로를 컨트롤하며 밀어붙였다.

이런 똥배짱, 어디서 나왔는지…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또 일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대박집’ 쥔장이 되어 있었다.유동 인구도 많지 않은 동네. ‘반찬가게만으론 어렵다’ 싶어 테이블 몇 개를 놓고 ‘런치 뷔페’를 열었다.

“와서 한번 잡숴보세요~”식사하신 분들이 반찬을 사가고, 입소문이 퍼졌다.

칭찬받은 고래처럼 나는 신나게 일했다. 일중독이 되어갔다. 내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밤이면 우렁각시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을 해놓았다. 남편은 투자했다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 지적질이다. “그걸 누가 먹어?” “그렇게 퍼주면 누군 못하냐?” 부정적인 말투는 타고났다. 알고 보면 불안장애에, 분노조절이 안 되는 불쌍한 사람. 조금 일찍 명퇴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말했다. “그래, 때려치워!”

이젠 나의 식자재 담당이다. 여전히 성질머리는 종잡을 수 없지만, 나에겐 필요한 ‘매입 담당자’다.

초창기엔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 못 해 주말마다 혼자 나와 다음날 장사 준비를 해야 했다.

직원보다 사장이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신념. 모든 반찬은 내 손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 구조를 내가 만들었기에, 내 몸은 고달팠다. 손님들은 줄을 서서 내 음식을 기다렸다. 매일 식사하러 오시는 어르신들.

“구내식당이야~” 하며 웃으셨지만 맛있고 건강한 밥상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씀에, 나는 더 힘을 냈다. “너 참 대단해.” “잘하고 있어.” “멋지다!”

힘든 나를 내가 위로하고 내가 다독이며 십여 년을 달려왔다.

그리고… 막내가 서울대 공대에 합격하던 날. 매장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아들 학원비 벌어보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드디어 해냈구나!” 그러나, 아픔은 조용히 찾아온다.

막내가 군대 가는 날 밤. 잠이 안 와 뒤척이다 우연히 가슴을 만졌는데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뭐지…?’ 온몸이 뜨거워지며 불길함이 엄습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 아들을 데려다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아들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 누구도 내 얼굴에 깃든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놈이 그 고약한 놈이라면? 가게는 어떻게 하나?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다음날, 실장님에게만 귀띔을 했다. 가족들에게 말하면 난리가 날 테니까. 일단 가게 수습이 먼저였다. 내 손으로 직접 하던 음식. 레시피는 일부만 정리된 상황. ‘지금 당장은 아프지 않으니까… 하나하나 영상 찍고, 레시피 정리하자.’ 정신 바짝 차리고 수습하자. 벌어질 일이면 받아들이자.

3개월쯤 지나, 큰딸에게 딱 걸려 병원에 끌려갔다.동네 의원에서 조직검사. “유방암입니다.” 왜 이제 왔냐고, 크기가 꽤 있다고.암덩이는 오십 원짜리 크기였지만 건드리고 나니 오백 원짜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암환자가 되었다. 대학병원으로 옮겨 다시 정밀검사. “호르몬 양성, 유방암 2기입니다. 전이는 없습니다.” 나는 전이만 없길 바랐고, 정말로 전이는 없었다.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인사했다. 딸은 눈물을 터뜨렸다.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왜 감사해?” 하지만 전이 없는 2기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신나게 전화했다. “2기래~ 전이 없대~” 친구들은 말했다. “암 걸리고 이렇게 신난 사람 처음 봐.” 수술 전날까지도 매장에서 일했다. 오디오북으로 《시크릿》 같은 긍정적인 책을 들으며 스스로를 컨트롤했다. “두려울 거 하나도 없어. 난 이겨낼 수 있어.” 설날 대목을 마치고 정월 대보름 나물과 오곡밥까지 준비했다. 병원으로 향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 죽음을 손님들께 알리지 마라.”

2022년 2월 16일, 나는 수술을 받았다. 1인실 병실에서 호텔처럼 조용한 이틀을 보냈다.

8번의 항암치료, 24번의 방사선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벌써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암을 떼어냈고, 그놈과 싸워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 그게 가장 중요하다. 2022년 1월 1일, 나는 미라클 모닝을 시작했다. 암 진단도 그때 받았다. 책을 읽고, 디지털 공부를 하고, 인스타와 블로그를 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이미 ‘암환자’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환갑이 넘은 지금쯤 그저 ‘할머니’로 불리며 살았겠지. 하지만 난 지금도 꿈을 꾼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시 꿈을 그리고 목표를 세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중이다. 암이 나에게 준 선물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나는, 꿈조차 잊고 살던 나에게 꿈을 선물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꿈꾸고 싶은 거. 하얀 도화지 위에 다시그려보는 거야…

늦지 않았어~

하고 싶은 거 다 살아~~

꿈? 다시 그려 보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