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하는 자세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의 사랑하는 엄마가 갑자기 88년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버지와 혼례를 치르고, 믿기지 않는 36세의 나이에 홀로 되셨다.
물 건너 동네에 살던 곱디고운 울 엄니는, 서울에 유학 중이던 아버지를 만나셨다. 인물 좋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촌동네 개천의 용이었던 아버지. 두 분은 결혼해 여섯 남매를 낳았다.
집안의 귀하디귀한 외동아들이었던 아버지. 서울 유학 중 엄마와 결혼하셨지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아프셔서 누워 계셨던 모습뿐이다.
아버지는 일찍 하늘로 가시면서도 여섯 아이를 남기셨다. 내가 열 살이던 해. 그해 우리 형제들은 열셋, 열, 일곱, 다섯, 셋, 그리고 엄마 뱃속에 있던 막내까지… 그렇게 우리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고, 엄마에겐 '과부'라는 무거운 멍에가 씌워졌다.
어릴 적, 정말 싫었던 그 단어 '과부'. 평생 내 입에 담지 않으려 했던 그 말이,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니 오늘 따라 가슴속에서 떠오른다.
아버지 병간호로 무너져가던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마음을 모아 세우셨다. 아버지 대신 손주들을 키워주신 나의 할아버지 역시 존경스러운 분이다. 덕분에 올망졸망 여섯 남매는 주변의 인정받는 반듯한 아이들로 잘 자라났다.
엄마는 예순에 뇌경색이 한 번 왔었다. 그때는 엄마가 영영 못 일어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엄마,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정신력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그건 기적이었다. 거의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셨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흔에 다시 찾아온 뇌경색. 이번엔 오른쪽이 마비되어 손발이 불편해지셨다. 그래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빨래도 하고, 밭일도 하시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셨다. 결국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다시 회복하셨다.
우리 엄마는 강한 분이었다. 좌절하지 않았고, 불편한 몸으로도 스스로를 지켜내셨다.
2년 전, 동생이 새 집을 지었다. 엄마 방도 새색시 방처럼 예쁘게 꾸며 드렸다. 엄마는 너무 좋아하셨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씀도 잘 하시고 식사도 손수 챙기셨는데, 올해 들어 많이 야위어 가셨다. 점점 입맛도 잃으시고 잘 드시지 않으셔 걱정이 되었다.
장사를 해야 하는 나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저 단백질 보충 음료를 택배로 보내드렸다. 주말에 찾아뵈면 엄마는 말수가 줄고 어눌해 보이셨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실 줄은 몰랐다.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땐 이미 말씀은 못 하시고 숨만 몰아쉬고 계셨다.
"아직은 아닌데... 엄마 아직 아니야... 엄마,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 많은데..."
며칠 전만 해도,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드린다고 하셨다. "빨리 하늘나라 가야지, 자식들 고생 안 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정말 그렇게, 마지막 숨을 조용히 놓으셨다.
휴대폰 앱으로 기도문을 틀어드렸더니, "그거 계속 틀어줘..." 하시던 그 목소리.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고 황망하지만, 한편으로는 고통 없이 편안히 떠나신 모습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엄마다웠다.
주무시는 줄만 알았다. 외삼촌과 이모가 오셔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셨다. 병석에 오래 누워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으시려, 조용히 떠나신 게 아닐까.
조금 더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는데… 88세의 나이에 또렷하게 말씀도 잘하시던 엄마. 거동이 불편하신 지는 고작 일주일 남짓. 그 짧은 병세 끝에 조용히 세상을 마무리하셨다.
엄마는 깔끔한 걸 좋아하셨다. 무심코 갈아입힌 흰 면티가 누렇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거 가져오라는 말씀에 급히 쿠팡으로 흰 면티 긴팔 세 장, 반팔 세 장을 주문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중 두 장만 입고 떠나셨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고 여섯 남매를 키워내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내가 어찌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우리 엄마는 참 현명하신 분이었다. 다정다감하지는 않아도,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으셨다. 함께 사는 며느리에게도 단 한 번 탓한 적 없으셨고, 늘 덕 있는 말씀만 하셨다. 자식들을 위해 늘 기도하시던 엄마.
딸에게 살가운 말을 잘하지 못하셨던 엄마. 나도 그런 엄마를 그대로 닮았다. 네 딸 중에서 엄마의 재주와 성격을 가장 닮은 딸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 많아서일까. 둘째인 나는 더 안중에도 없는 듯 시린 마음일 때도 많았다. 첫째는 첫째라서, 셋째와 넷째는 아들이라서, 막내들은 막내라서 챙김을 받았다.
욕심 없는 나는 내 몫이 생기면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엄마 눈엔 나는 늘 씩씩하고 풍족한 딸로 보였나보다.
엄마 떠나시기 이틀 전, 큰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맏아들로서 끝까지 엄마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엄마에게 그리 녹록한 딸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 딸, 아들, 아들, 딸, 딸. 여섯 남매 중 둘째인 나는, 어릴 적 종종 엄마에게 대들었고, 요리한다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 말란 재봉틀을 굳이 해보겠다고 바늘을 부러뜨려놓곤 했다. 호기심 많던 사고뭉치 딸.
이젠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 떠나시기 이틀 전, 나는 마음속에 쌓였던 작은 앙금을 스스로 털어냈다. 그래, 내 탓이었어. 그 순간 몸에서 시원하게 뭔가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사랑이었구나.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고단한 삶을 버텨오신 나의 엄마. 마지막도 평안하게 눈을 감으셨기에, 위로가 된다.
엄마는 원하던 마지막 모습대로, 고요하게, 품위 있게, 떠나셨다.
하느님을 믿었던 엄마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도 엄마다우셨다. 너무 편안한 얼굴.
나는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엄마, 하느님 만나고 아버지도 만나고… 그동안 고마웠어요. 엄마, 천국에선 많이 많이 행복하세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