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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로지 Nov 22. 2022

해가 지기 전에 I 04 (완)

단편 소설

04.


“늦었지.”

“괜찮아. 나도 금방 왔어.”

“비가 오니까 길이 막히네.”


먼저 와있는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남편과는 가끔 만나서 식사를 했다. 아니, 식사 말고도 많은 것을 함께 했다. 가끔 마블 시리즈 영화가 나오면 같이 보고, 맥주 마시며 전화통화도 꽤 자주 했다. 잠자리를 제외하고는.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났다. 우리는, 이 호텔에서 2년 전 결혼했다. 우리가 이혼한 것을 알리가 없는 호텔 측에서는 해마다 식사권을 보냈다. 무료 호텔 식사권을 그냥 날리기는 아까우니, 해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물론, 좋은 사람이 서로에게 생긴다면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고도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몇 번 만나 식사를 하며 몇몇 연구원 사람들을 마주친 뒤 이상한 사이라 연구원에 소문도 났다. 남들이 어떻게 떠들던 상관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꽤 좋은 친구가 되었고, 고민이 있으면 함께 해결해 나갔고, 전보다 더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재결합할 생각은 없었지만. “살 때 그랬으면 좀 좋았어”를 유행어로 밀며 많은 것을 함께 하는 중이었다.


둘 다 메뉴판을 보며 또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먼저 메뉴를 결정했다.


“나는 이거. B코스.”

“어쩐 일로 결정을 빨리해?”

“그냥 요즘 연습 중이야. 생각 없이 사는 것. 그냥 찍는 거야.”

“그럼 나도 이거.”

“그건 발전하지 못한 거야. 남의 걸 따라오고 있잖아, 또.”

“그럼 나는 A코스.”


내 말에 그는 나와 다른 코스요리로 주문을 변경했다. 내가 선택한 B코스의 관자가 너무 덜 익은 것 빼고는 기분 좋은 식사였다. 후식으로 나온 마카롱과 예쁜 찻잔의 티를 마시며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연구원 옮기려고.”


나의 말에 놀란 듯 그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응 좋아했어.”


“근데 왜?”

아니 사실  연구원에서 노을을 보는  좋아했어."


“나는 그 창가에서 보는 노을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노을은 거기서만 예쁜 건 아니더라. 그냥 내가 그동안 그 안에만 갇혀서 몰랐던 거였어. 저번에 오랜만에 결혼식 다녀오면서 버스에서 차가 막히는데도 해가지는 걸 보며 오는데 너무 황홀한 거야. 그래, 황홀. 그 단어가 딱이었어. 그래서 알았어. 어디서든 예쁜 거였구나. 그래서 옮겨보려고. 다른 곳에서 보는 노을은 얼마나 예쁜지.”


“큰 창가가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네.”


다른 어떤 말보다 기뻤다. 어디로 옮길 것 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신중히 생각해 보았는지 따위를 묻지 않아서. 다른 노을을 보겠다고 하는 내 이상한 말에 근사한 답변을 해줘서. 그제야 나의 말을 모두 듣고 다시 찻잔을 드는 그에게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계절은 또 지났다. 완연한 봄은 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시작의 계절임을 알리는 듯 거리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근처 대학에 플래카드가 여러 개 붙었고, 연구원 역시 분기보고서 준비와 새 프로젝트 제안서 준비로 분주했다. 나만 그 분주함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 주면 새로운 곳에서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도와준다고 해도 한사코 사양하는 팀원들 때문에 며칠 째 짐 정리만 하기도 뭐해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 8층으로 올라왔다. 언제나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창 밖을 한참 바라봤다.


“선배 여기 있네.”

“응?”

“저녁 회식 메뉴 뭐가 좋은지 단체방에 올렸는데, 제일 중요한 선배가 답을 안 하니까 정할 수 가없어서요.”

“앗, 미안”

“이 시간에 자리에 없으면 늘 여기 있더라 선배는.”

“맞아.”

“뭐 봐요?”

“해 지는 거?”


신기하게도 나의 흑백의 눈은 점차 돌아왔다. 갑자기 한 번에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흐릿해졌던 색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다시 거리의 불빛이 반짝임을 느끼게 됐다. 아직 청색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어딘가 불안하던 마음을 안도할 수 있게 해 줬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이 한참 지나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아무리 이 자리에서 바라봐도 보이지 않던 창밖의 노을 역시 불그스름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늘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어디쯤인가 했을 때 이 해가지기 전 시간이 아닐까 하고. 찬란하지만, 슬프고, 황홀하지만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이 시간이 지나면 캄캄한 밤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꼭 해가 지기 전 하고 싶었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 내 인생의 주축이 되는 것. 내 인생을 내가 돌보는 것. 진짜 어른이 되는 것.


“이 시간을 좋아해. 내가. 해가 지기 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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