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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ug 12. 2023

여유와 설빈 3집 작업 기록 - 여름

지난 이야기

요즘은 작업 중인 곡들을 시시때때로 듣고 있다. 낮, 밤, 새벽, 컨디션 좋을 때, 고요할 때, 술 취했을 때, 모니터 스피커로, 이어폰으로, 차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어떤 상황에서 청취하냐에 따라 매번 감상이 달라지지만 공통적으로 좋았던 결들을 찾아가고 있다. 몇 곡은 완성에 가깝게 되었고 아직 미진한 곡들은 차츰 채워나가고 있다.


몇 차례의 추가 녹음이 있었다. 집에서 클라리넷과 베이스 클라리넷을 녹음하고, 스튜디오에서 기타와 보컬 코러스를 더했다. 소스를 늘리면서 곡마다 여러 버전이 생겼고 소스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게 느껴졌다.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용 mp3 파일을 추출하여 차곡차곡 기록을 쌓고 있는데, 지난 겨울에 녹음했던 기록을 다시 듣다가 무릎을 탁 쳤다. 때론 진정한 아름다움이 비워진 상태에 있다. 채우기에 급급하다가 다시 덜어내는 방향으로 작업이 흘러가고 있다.


한 노래에 상당히 많은 요소가 들어가고 각각을 어울리게 조합하는 과정이 참 신기하다. 요소마다 역할을 평가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보컬의 속도감과 톤을 조정하고 악기들의 위치를 배치한다. 작은 방에서 사색하듯 들리는지, 드넓은 초원에 내던져진 것 같은지의 공간감도 조절한다.


노래를 들으면서 최상의 어우러짐을 찾기란 마치 새까만 머리카락 중 새치를 발견하는 일과 비슷하다. 여기는 좀 튀는데요? 수정이 필요하겠어요. 까맣게 염색을 하든가.. 하면서. 나는 한 올의 새치도 까맣게 물들이고 싶어 하고 여유는 약간의 희끗함은 남겨두고 싶어 한다.


믹싱 작업은 대부분 여유와 경덕 둘이 만나 진행하고 있다. 여유는 날 것의 느낌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완성도에 있어서는 강박적인 편이다. 귀 기울여 들어도 잘 모를 사소한 부분까지도 집요하게 듣는다. 언제 한 번은 경덕이 여유에게 배시시 웃으며 ‘여유야, 난 네 안의 악마를 알고 있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난 그 악마를 2집 작업할 때 본 적 있다. 함께 있으면 고통이 수반되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결과로 이끌기도 하는 중독적인 존재다.


작업 후반기로 들어서며 보조 프로듀서 이대봉, 드러머 김창원, 트럼펫터 장보석을 새롭게 초대했다. 대봉은 경덕과의 연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희극이라는 노래의 편곡을 의뢰하려고 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앨범의 전반적인 매무새를 함께 만져주는 역할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노래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귀가 무뎌진 감도 있는데 대봉이 새로운 귀와 눈으로 이야기해 주니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서울에 살아서 우리는 전화로 메일로 작업 이야기를 하며 사이버 러브를 이어가다 곧 있을 서울 공연에서 만나기로 했다.


창원은 여유와 중학생 때부터 친구이고 드러머로 오래전부터 활동 중이다. 지금은 여섯 밴드의 드러머로 역할하고 있다. 한 팀도 힘든데 여섯 팀이라니 경이롭다. 그는 2집에서도 드럼으로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기꺼이 제주로 출장 와주었다. 전에 창원에게 노래들을 보내주었는데, 제주에 오기 전까지 혼자 음원을 들으며 드럼 리듬을 일일이 다 짜놓았다.


스튜디오에서 드럼 녹음을 할 때에는 편곡이 확정되지 않은 노래에도 어떤 리듬을 넣으면 좋을지 함께 고민했다. 세션과 작업할 때는 악기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니 느낌적인 느낌으로 소통해야 하는 게 있다. 예전에 나무문을 두드렸던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여유는 직접 투명 드럼을 만들어서 쳤다. 창원은 그 투명 드럼을 연주에 반영하려고 했는데 여유의 심오한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흐린 눈을 해야 했다.


한참 작업하던 중에 창원에게 전화가 왔다. 보석이었다. 태풍 카눈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되어 제주에 더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보석과 직접적인 연은 없었지만 안 지는 오래되었다. 예전에 SNS 피드에 누군가 옥탑방에 텃밭을 하는 사진이 올라왔길래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소식을 받아봤다. 트럼펫 사진도 있었고 영국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사이 보석은 여유와 설빈을 알게 되어 공연을 보러 왔고, 우리는 보석이 트럼펫 세션으로 활동할 때 보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알아도 따로 얘기해본 적은 없었다.


알고 보니 보석의 고향은 경남 창원인데 나의 고향도 창원이다. 보석과 나를 이어준 사람은 드러머 창원이다. 비행기 결항부터 황당한 우연적 만남이 신비하고 놀라웠다. 희한한 인연이다. 작업이 즉흥적으로 시작되었음에도 보석은 정성으로 참여해주었다. 급하게 트럼펫을 빌렸던 터라 자기 악기도 아니었는데 다 아름답게 들리고 황송했다. 참, 여유는 이때도 투명 트럼펫을 만들어 열심히 불었다.


당산봉을 배경으로 쪼로록 앉아 사진을 찍었다.


작업을 마치고 다같이 바다 수영을 하러 갔다. 해녀 할망들이 물질을 나갈 때 출발하는 곳이라며 경덕이 소개했다. 깜깜한 바다로 들어가는 길이 경사져있어 그곳에 누우면 밤하늘의 별들이 눈앞에 광활히 펼쳐진다. 창원은 정가운데에 보이는 별들이 북두칠성이라고 설명했다. 한참 동안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사이 사이에 선명한 별들을 보았다. 별똥별이 똑 떨어졌다. 이번 작업 잘 마무리하게 해주세요.


우리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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