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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pr 11. 2023

여유와 설빈 3집 작업 기록 - 겨울

새해 둘째 날부터 3집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우리는 새해에 운동한다는 다짐처럼 타오르는 작업 의지로 램프 스튜디오에 향했다. 램프는 제주 서쪽 끝 고산에 있어 집에서 한 시간 넘게 차로 움직여야 한다. 살짝 동쪽에 사는 우리는 서쪽에 가려면 여행을 가듯 채비를 한다.


램프 스튜디오의 주인장은 강경덕 님이다. 경덕은 제주에 내려오고 나서 만난 인연이다. 이전에는 구제주 쪽에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우리가 2집 작업을 했던 2019년도 즈음에 고산으로 옮겼다. 그동안 만날 때마다 같이 작업해 보자는 얘기를 나누었는데 엇갈리다가 기회가 온 거다.


램프에서 녹음을 결정하기 전에는 오랜 고민이 있었다. 어디서 작업을 주로 할지. 제주에 살지만 서울에 자주 오가는 상황이고 훌륭한 스튜디오가 많아 결정하기 어려웠다. 멋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작업하는지도 알아보았는데, 많은 사례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고 따라 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여유와 설빈 자체에 대한 물음표도 많이 떠올랐다. 1집은 주로 Ctrsound의 손을 빌렸고, 2집은 직접 프로듀싱하며 코프로듀서였던 김해원과 여러 세션들의 도움을 받았다. 3집 작업을 목전에 두고 여유와 설빈의 새로운 음악은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표현이 필요한지 생각했다.


승효상 건축가의 ‘빈자의 미학’을 읽었다. 그는 건축을 할 때 고려할 세 요소가 합목적성, 장소성, 시대성이랬다. 집을 짓는다면, 성격이 또렷하고 올바르게 놓여있으며 땅과 시간의 흐름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작업 생각이 많을 때여서 음악에 금방 대입하게 됐다. 여유와 설빈 두 사람이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정돈하고, 우리가 지금 사는 땅과 여기서 경험하는 정서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고 정리를 했다.


우리는 제주의 램프스튜디오에서 첫 삽을 뜨게 되었고, 그간 그려온 밑그림을 살피며 뼈대를 세우는 일을 했다. 주로 기타 녹음과 보컬 가이드 녹음이 이루어졌다. 제주에서 작업을 하니 가지고 있는 기타들을 죄다 스튜디오로 가져올 수 있어 좋았다. 어떤 기타는 잔잔한 물결처럼 찰랑거리고 어떤 기타는 줄을 튕기면 묵직하게 배가 울린다.


한동안은 여유가 기타 녹음만 해서 나는 귀만 열어놓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곳을 거쳐간 음악가들이 이미 눕는 맛을 본 모양인지 얇은 이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유는 내가 안락함에 스르르 눈이 감길라치면 꼭 내게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그는 할 일이 정말 많았어서 누워있던 내가 부러웠을 것이다.(미안)

누워있으면 작업실이 이렇게 보인다.

여유는 보컬 녹음을 꽤 수월하게 했는데, 나는 고질적으로 비염을 달고 살아서 쉽지 않았다. 말할 때는 괜찮은 것 같다가도 녹음을 하면 코맹맹이 소리가 거슬렸다. 몇 번 시도하다가 괜찮은 때가 오면 이때다 싶어서 바짝 녹음했다.


한 곡은 원테이크로 우쿨렐레와 내 보컬을 동시녹음했다. 여유 솔로 시절에 만들었던 ‘흐르는 그리움’이나 여유와 설빈 1집의 ‘먼 훗날 당신과 나’와 비슷한 작업 방식이다. 메트로놈 소리를 듣지 않고 동시에 녹음하면 현장감이 훨씬 살아난다. 대신 실수하면 돌이키기 어려워서 최대한 서로를 보면서 했다.

뒤에 조그맣게 여유 얼굴이 보인다.

경덕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오랫동안 제주의 자연 소리를 수집해 왔다. 그는 우리가 녹음한 소스에 선흘 곶자왈 숲소리, 하예동의 밤 빗소리, 알뜨르 비행장의 들판소리 등 여러 소리들을 입혀보았다. 그의 재미난 표현을 빌리면 ‘은총의 눈물‘이라는 효과를 넣기도 했다.


한 번은 같이 밥을 먹다가 반주를 하게 됐다. 경덕이 막걸리병을 흔들며 ‘막걸리를 흔들어 먹지 않는 건 농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에 여유와 나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걸리론이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닮아있음을 알게 됐다. 경덕은 우리 노래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함께 울림을 찾으려 늘 진중한 태도를 보인다. 여유와 설빈의 노래도 막걸리처럼 흔들어 완전한 맛을 느끼려고 한다.


작업하면서 산책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나와 걸으며 기지개를 켜고 당산봉의 정기를 받았다. 양배추와 콜라비가 심어진 밭 옆을 거닐며 아직 음원도 완성되지 않았으면서 뮤직비디오를 여기서 찍는 건 어떨까 상상을 했다. 계속 다음을 떠올려야 하는 상태가 쉽지는 않지만, 뼈대가 완성되어가는 사실 자체로 반갑다.


어느 날의 작업실


겨울의 우리

당산봉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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