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진로부장님이 생태환경동아리 교사를 모집한다고 해서 신청해 보았다. 비건은 아니지만 집에서 비건 요리를 손에 익힌 지가 꽤 되었고, 환경에 관심 있는 아이들과 함께 활동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화분에 키우고 싶은 작물을 길러보고 그걸로 비건 요리를 해 먹는 상상.
우리 동아리의 이름은 '풀씨'로 정했다. 변화는 씨앗과 같이 미미한 형태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가능성과 시작에 더 의미를 두자는 뜻으로. 동아리원 모집을 공지하자 서른 명 가까이 참여 의사를 보였다. 신청 동기는 텃밭 경험이 있는데 재밌어서, 부모님이 귤농사를 하는데 어차피 맨날 하는 일이니까,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자기들이 생태 전문가여서(탐구 정신이 강한 남학생들), 깻잎을 키워서 들기름을 짜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직접 짠 들기름이 당근마켓에서 인기가 좋다고 한다.). 아이들이 사소한 호기심부터 원대한 꿈까지 품고 이 동아리에 참여하겠다고 달려들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는, 작은 규모로 아이들과 꽁냥거리는 상상과는 달리 큰 밭을 갖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런 생김새는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동아리 소식을 듣고 화분에 작물을 키우는 것보다는 텃밭이 낫다고 추천해 주었고 학교에 노는 땅을 알아보게 되었다. 이 땅은 몇 군데 후보 중 하나였는데 예전에 텃밭을 했던 흔적이 있고 수도는 끊긴 상황이라 물을 끌어와야 했다. 풀이 가득하고 빛바랜 보도블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땅이었다.
3월에는 아이들과 텃밭 계획을 세워보았다. 개개인이 어떤 형태의 밭을 만들고 싶은지 계획했다. 별 모양으로 하고 싶다, 원으로 퉁치고 싶다, 다른 훌륭한 친구 따라가고 싶다, 자로 그어가며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싶다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각자가 그린 텃밭 모양을 벽에 붙여 익명 투표를 진행했다. 두 텃밭이 박빙이었는데 꽃모양으로 화려한 밭과 반듯하게 그린 밭 중에 반듯한 밭이 최종 우승하였다.
밭 모양이 결정되고 난 후에는 봄에 어떤 작물을 심을지 계획했다. 깻잎, 상추, 오이, 방울토마토, 초당옥수수, 고추, 딸기, 로즈마리.. 누군가 블루베리 나무도 심고 싶다고 하길래 못할 게 뭐 있어하고 알아보았는데 블루베리 묘목은 지금 구해봤자 올해 수확도 못하고 관리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그건 포기하였다.
아이들이 열심히 밭 모양을 상상하는 동안에 땅을 뒤집어 놓았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붙는다고 해도 오랫동안 쉰 땅을 쓸만하게 만들기가 벅찰 것 같아 근처 농원에 SOS를 쳤다. 하루종일 땅을 뒤집었는데 돌이 무지막지하게 나왔다. 작업하는데 돈도 많이 들었다.
그 뒤로는 오로지 아이들의 힘으로 해내고 있다. 무거운 보도블록 옮기기, 우리가 만들기로 한 텃밭 모양대로 돌 놓기, 잡풀 뽑기, 솔잎을 주워 길에 붓기, 삽질, 호미질, 생태 탐구. 주 1회 만나다가 지금은 매일 점심에 모이고 있고 일일 알바들도 와서 기꺼이 도와준다. 며칠 사이에 밭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춰가고 있으니 피라미드는 사람이 만든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분야 전문가인 기술가정 선생님들의 도움도 톡톡히 받고 있다. 변 선생님은 얘들아 삽질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시범을 보여주고, 집에서 로즈마리 가지를 잘라와 아이들이 직접 물꽂이해보게끔 도와주었다. 한 선생님은 점심마다 텃밭에 와서 아이들과 땅 가꾸기에 동행하며 앞으로 무엇을 심을지 상상의 나래를 함께 펼쳐나가고 있다. 두 분과 함께 텃밭을 만드는 게 우리 동아리에 큰 복이다.
딸기는 근처 농원에서 기르던 딸기가 있다고 해서 먼저 심어보았다. 빨갛게 익은 것들은 하나씩 먹기도 하고 새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두기도 한다. 수도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는 작물을 심을 땅을 손볼 계획이다. 땅을 뒤집어 상토도 섞고, 산더미처럼 쌓인 잡풀로 멀칭도 하고. 아무것도 없던 땅이 하나둘 손때가 묻어 제법 귀여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동아리원을 모집할 때만 해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일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의 솔선해서 땅을 가꾸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배우는 일이 더 많다.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다. 풀 뽑으면서 딥톡하기, 보도블록 들고 하는 스쿼트, 괭이와 호미는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다 다툼, 땡볕에 일하고 새참으로 아이스크림 먹기 등. 이 텃밭에서 앞으로도 재미난 장면들을 쌓아나갈 예정이다. 다같이 초당 옥수수를 먹을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