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새 학기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학생이 되어 책가방을 메는데 감회가 새롭다. 우리 연구실은 아주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각 지역에서 약 1.2배속으로 살던 사람들이 모인 듯싶은데, 다 뭉치니 거의 2.5배속의 효율을 보인다. 진은 자발적으로 학년 대표를 하더니 온라인 연구실도 만들어 놨고, 임은 좁은 연구실에 9명이 편하게 숨 쉬도록 구조를 바꿔놨으니 둘은 초등교사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혁신가 같다.
내가 보기에 가장 속도감이 빠른 사람은 김이다. 전주에서 들어야 하는 교육에 참여하려고 사이트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가만있어봐, 강사한테 여기로 와줄 수 있냐고 물어볼게요." 하고 이미 다이얼을 누르고 있다. 손도 어찌나 야무진지. 이른 아침에 블루베리, 라즈베리, 요거트와 꿀을 갈아 스무디를 먹어보라고 준다. 그에게 눈곱도 떼기 힘든 아침이란 없는 걸까? 감탄이 나오는 에너지다.
풋풋한 신입생들에게는 여러 교육이 준비되어 있다. 당장 학교 상담센터에서 접수상담을 진행하고,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상담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성실한 참여가 필수적이다. 오늘은 집단상담 교육을 받다가 다함께 텔레 게임을 하게 됐다. 텔레 게임은 집단지도자가 어떤 주제를 던지면 그 주제에 가장 걸맞는 집단원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다. 그중에 한 주제는 이랬다.
"무인도에서 단둘이 있어야 한다면 누구와 함께 있을 건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김이 어디 있는지 잽싸게 찾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김을 선택한 이유는 명료했다. 나라를 세울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속도감과 에너지라면 아무리 척박한 무인도에서라도 잠잘 곳을 만들고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이다. 괄목할 만한 역동성으로 무인도에서도 함께 잘 버틸 것 같았다.
내 어깨 위에는 오 선생님이 손을 올렸다. 이유를 들어보았다.
"무인도에서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된다면 괜찮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나는 언제나 달려왔다. 어떻게 더 잘하고, 어떻게 더 많은 것이 가능하고, 효율도 가성비도 좋을지 고민하면서. 얼마 전 한 베이시스트가 음악가들이 좋은 앨범을 만들려면 혈변을 토해야 한다고 했었지. 나는 줄곧 삶도 피똥을 싸야 나아지는 거라고 믿어왔다.
그러다 문득 무인도에 덜렁 남겨진 나와 오 선생님을 상상해 봤다. "당장 몸을 뉠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근처에 나뭇가지를 주워 들다가, 멀리 바닷물에 발을 담근 오 선생님을 보고는 나뭇가지를 내려놓는다. 파도는 규칙적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햇빛에 데워진 모래가 발바닥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눈앞의 죽음에도 겁이 없어지고 호흡이 느려진다. 새로운 나라 세우기를 그만두고 느낀다. 내가 서있는 곳이 무인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