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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영 Jul 24. 2022

미지의 세계

MAY, 2015 / <GQ KOREA>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책 그림의 유행이 조선 후기에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책거리화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사실 책거리화는 미지美知의 세계다.


<책거리>, 2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64×31.9cm, 52.8x28cm, 일본민예관.


2008년 3월 11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는 ‘Beauty & Learning’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한국미술을 담당하는 이소영 큐레이터가 영입된 2003년 이래 적잖은 한국미술 관련 전시가 기획되었고, 이 전시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는 거의 기사화되지 않은 가운데 몇 편의 기사가 나갔다. 부적절한 제목과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국 병풍 전시회 열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등장한 조선시대 병풍.”

병풍은 병풍이다.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를 단지 ‘추리소설의 대가’라고 부르는 건 합당한가. 어떤 통념을 들어 설명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통념과 실제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까지가, 내가 아닌 대상을 다루는 윤리다. ‘Beauty & Learning’의 전시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With the popularity of ch’aekko˘ri (“books and things”) paintings under royal patronage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다른 나라의 언어로는 ‘ch’aekko˘ri’라고 어렵게나마 표현되었으나 한국의 언론은 하지 않았다. ‘책거리화’라고 쓸 수 있는 나라의 눈은 ‘Beauty & Learning’이라기보다 ‘한류’를 향했다.

“Do you Know 김연아, 싸이, 박지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인 발상은, 질문도 질문이지만 질문의 동기를 이루는 내용이 없어서 좀 더 심각하다. 한국의 병풍은 자랑스러워하면서, 책거리화가 담긴 병풍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책거리화, 그러니까 한국의 문화를 통해 ‘Beauty’와 ‘Learning’이라는 보편을 사유해본 경험도 없다. 종종 이런 식의 문제 제기는 전통문화 혹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의 촉구로 오해된다. 하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들어본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앞마당으로 되돌아와 말한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일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학식을 늘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말이다. ‘한국인인 나’와 ‘내가 바라보는 지금의 세계’가 ‘문文’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나라 조선이 닿고자 한 이상과 절망을 드러내는 ‘책거리화’와 무관하지 않다.

책거리화는 정조의 장려를 계기로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조선에서 크게 유행한 그림 양식이다. 책장에 책과 문방구, 도자기, 청동기 등의 장식품을 배치한 그림을 ‘책가도’로, 이후에 주로 민간에서 책장 없이 그려진 비슷한 유의 그림까지 포함해 ‘책거리화’라는 좀 더 넓은 품의 단어로 불렸다. 지금 세대에게는 책보다는 (영화배우 현빈이 <역린>에서 보여준) 근육으로 익숙하나, 정조는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하고 24년의 재위기간 동안 150여 가지 분야에서 4천 권 이상의 책을 편찬하고 출간한, 애독가이자 애장가였다. 1792년의 문체반정 이전에, 책으로도 모자라 책거리화까지 동원해 ‘문文’을 강조했다. 책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봤다.

일반적으로 오봉병이나 십장생도 같은 병풍을 두는 게 관례인 어좌에 책거리화 병풍을 세우도록 했다. 정조는 그의 시문집인 <홍재전서>에서 말한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치 현대의 애호가가 털어놓을 법한 감상이다.

정조가 당시 화원이었던 김홍도에게 책거리화를 그리도록 지시했고, 그의 솜씨가 무척 뛰어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림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활동한 화원 장한종의 책거리화를 통해 정조가 높이 산 책거리화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앞의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근래 사대부의 취향이 매우 괴이해져,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중국식을 익히고 싶어 한다. 책뿐만 아니라 일상 기명집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산을 사용하며 그것이 자신의 고상한 문화인 양 과시하려 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 소개에서도 지적하는 바, 대부분의 책거리화에는 조선이 아닌 서양과 청나라의 진귀한 ‘기명잡기’가 등장하고, 오히려 책을 압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을 그려 책을 가까이하라는 정조의 뜻은 유학자와 관료에 이르러 사회적 지위와 취향의 과시가 되었다. 사치와 향락이 만연한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를 일깨우기는커녕 불을 붙였다.

<호피장막도>(이 글 헤드의 그림으로, 8폭 병풍 중 4폭 수록, 19세기, 종이에 채색, 128×355cm, 삼성미술관 리움.)는 장식적인 책거리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트머스 대학 교수 김성림의 글 ‘양면성의 시대’에 잘 묘사되어 있다. “8장의 긴 표범가죽이 장막처럼 쳐져 있고 중앙의 2장의 가죽은 위로 걷어 올려져 있는데, 그 뒤에 고급 기물이 더 많이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안경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안경 주인이 이제 막 자리를 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제공된 많은 단서를 토대로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학자풍의 고상한 취향(골동품 청동기와 또 다른 사치품을 소장)을 지닌 (안경 쓴) 중년 남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선반 위의 마작판과 고상한 다구를 보면, 이 주인공은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다.”

매우 희귀하고 고가였던 표범가죽 장막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한편 단 두 폭의 책가에서만 자신의 학식과 취향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림에서 현재성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예사롭지 않다.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배경이나 설명없이 곧장 현장으로 뛰어드는 현대의 미학적 관점이 담겨 있다. 책거리화는 취향이라는 현대적인 개념과 그 궤를 같이하는 대상이었다.


<책가도>,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각 161.7×39.5cm,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화려하지만 정갈하고, 거대하지만 정연한 책거리화는 뜯어볼수록 좀 이상하다. 4~5개의 시점이 혼재하고 있다.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명예교수 이성미는 지적한다. “(이형록의 <책가도>의) ‘소실점’은 중심과의 거리와 일정한 규칙이 없이 우연히 일치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으므로 화가가 정확한 선 투시법을 이해한 경우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이규상이 ‘(김홍도가) 서양국의 사면측량법을 모방하였다’고 한 것이나 유재건이 ‘보는 사람들이 책들이 서가에 가득하다고 착각하였다’고 한 것은 그 이전의 그림들에 비하여 음영에 의한 공간감이나 사실적 묘사가 증폭된 것에서 오는 대략적인 인상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나라에 연행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르네상스의 산물인 원근법이 조선에도 전해졌다. 조선의 화원들이 책거리화에 원근법과 명암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그림에 입체감과 공간감이 두드러졌다. 정약용이 원근법을 ‘카메라 옵스큐라’ 이론으로 설명한 문헌이 전하나 어쨌든 조선의 화원들은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을 간접체험 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선 투시법에 대한 이해도 떨어졌고 측량도 철저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관습에서 오는 거부감이 있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한국문학사상 손에 꼽을 만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양화의 현실감을 묘사하면서도 “사물의 뜻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계를 분명히 했다.

오병재는 조선시대의 책거리화를 꿰뚫는 그림을 그리는 현대미술 작가다. 그의 대표작이자 흡사 책거리화를 연상시키는 ‘문양화된 지적 이미지’ 는 역원근법으로 그렸다. 영국 유학 중에 본 책거리화를 매개로,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다시점 그림에 대한 작가적인 관심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동양의 다시점은 서양의 다시점과 달랐다. 피카소로부터 데이비드 호크니로 이어지는 서양의 다시점에서는 주체의 눈이 이동한다면, 동양의 다시점은 나도 보고 타인도 보는 시선이 모여 하나의 형태와 정체성을 이뤘다. “정확히 말하면 역원근법이 아니지만, 그림이 전면성을 가지다보니 그림이 나한테 와서 맞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죠. 책거리화를 그렸던 조선 후기의 화공들은 굉장히 낮은 신분에 위치했어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뢰로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그래서 책거리화가 내 머릿속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처럼 보여요. 화가인 나의 시선은 책가 뒤에 있는 느낌이 나죠.”

원근법은 예술이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가는 서양 르네상스의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원근법은 가능성이자 한계로 작용했다. 실제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즉 원근법이 완벽하게 적용된 그림만이 그림 취급을 받았다. 반면에 책거리화는 애초부터 원근법에 비교적 구애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고관대작을 거쳐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원근법이 무의미해졌다.

원근법을 무시했다거나 파격을 선보였다는 거창한 뜻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방식으로 그렸다. 오병재 작가가 말했다. “서양은 과거에 철학, 종교, 왕실이라는 소재를 중요시했죠. 작가는 현실을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으면 됐어요. 현대에 와서야 작가가 어떻게 봤느냐가 중요해졌어요. 책거리화가 재밌는 건 민화 작가들이 현대적인 의미의 작가였기 때문이에요.”


<책거리와 서수>, 4폭 중 1, 3폭,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110×43cm,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예’라는 개념을 세우고, 어쩌면 어떤 한국인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깊이 아끼고 연구했던 학자이자 운동가였다. 1959년에 발표한 그의 글 ‘불가사의한 조선의 민화’는 두 명의 지인에게 기증받은 두 폭의 책거리 병풍을 소재로 했다. “나의 직관은 이 그림이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아무리 지혜를 동원해보아도 “이 그림처럼 모든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좀처럼 없다”면서 그 아름다움을 사유했다. “(이 그림은) 전혀 진실을 상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있는 동안에 저절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불합리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좌우간 합리성의 궁색에서 해방된 면은 있다. 한정에서 이탈한 불한정의 자유가 있다고나 할까, 혹은 이 자유로움이 아름다움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의 편을 드는 자유’만큼 한국의 민화를 정확히 설명한 말은 본 적이 없다.

한국의 민화 연구는 일본보다 많이 늦었다. 1975년 고단샤에서 선보인 두 권의 도록 <이조민화>가, 한국은 물론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애호가와 학자, 작가들의 경전 역할을 했다. 2015년 3월, 한국에서 처음 발간된 민화 도록 <한국의 채색화>가 아니었다면 그 지위는 좀 더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는데도 딱히 시행착오는 보이지 않는 완성도가 놀랍다. 세 권의 책에 각각 산수화와 인물화, 화조화, 책거리화와 문자화를, A3 사이즈에 준하는 크기로 국내외 50여개의 박물관과 개인소장자의 작품을 촬영해 실었다. 그림의 결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확대 사진, 민화에 관한 통찰을 주는 19명의 국내외 학자들의 해설도 함께 수록했다. 책을 기획하고 진행한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정병모 교수는 “첫째가 작품성, 두 번째가 희소성, 세 번째로 한국적인 것을 기준으로 선별”했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은 우선 배제된다는 판단이었다.

정병모 교수가 말하는 ‘작품성’은 민화의 핵심을 향한다. <한국의 채색화> 중에서도 민간의 책거리화에서 현대성은 두드러진다.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이 두 폭의 책거리 병풍에서 드러나는 파편적인 형식의 현대성에 주목했다. 실제로 책의 면은 제멋대로 설정돼 있고, 앞에 있어야 할 기물이 어떤 부분에서는 뒤로 빠져 있으며, 도자기의 형태, 소반의 위치까지 총체적으로 이상하다.

이를테면 그는 동양화에서 쓰지 않았던 “자를 사용해 긋는 선에 대한 흥미가 앞서 정말 중요한 원근법의 원칙을 몰아내는”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봤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현대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움의 편을 드는 자유’가 화공들의 순수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아주 우스운 것을 망설임 없이 그리고 있지 않은가. 상식에 조차 구애받지 않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욕심이 없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야심이 있었다면 이처럼 묘한 그림은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아주 티없이 솔직하게 붓을 옮기고 있다. 이것은 결코 뻔뻔스러운 태도가 있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고 점잖게 붓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서술은 상당 부분 서양 현대미술의 추상화에 관한 해석과 겹쳐 보인다.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의 큐레이터 피에르 캄봉은 ‘민화, 한국적 판타지-근대적 화두’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

민간의 책거리화 화공은 현실에 없는 형태를 그렸다. 정병모 교수는 말한다. “이런 무늬가 들어간 책이나 가구가 조선시대에 존재한 적이 없어요.” 단지 스스로 보고 싶은 무늬가 담긴 책과 가구였을 것이다. 무늬를 펼치고 싶으면 마땅히 그려야 할 모서리의 선도 그리지 않았고, 다른 대상은 다 수직으로 세웠더라도 책은 평면으로 표현하거나 책의 입체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어떤 책들은 공중에 떠 있도록 했다. 또한 그들은 이어질 수 없는 각각의 소재를 이었다. 책과 기물이 쌓여 있는 한쪽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통해 책거리화와 산수화를 결합한 그림은 논리적인 편에 속한다. 산과 강에 동물이 뛰놀고 있는데, 마치 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뒤편에 비슷한 크기의 책들이 솟아있거나, 책으로 가득한 책장의 시렁 한 칸에서 물속의 오리가 노니는 식이다. 그들은 화판이 현실과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에르 캄봉은 그 초현실적인 특성을 들어 르네 마그리트를, 평면적인 색 처리, 형상의 추상화, 모티브의 반복, 기하학적인 배열의 그림들에 대해 안토니 타피에스와 클로드 비알라, 나아가 파울 클레의 이름을 덧붙였다.


<책거리>, 6폭 병풍 중 2, 5폭,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각 41.2×23.6cm, 선문대학교박물관.


정병모 교수는 민간으로 내려온 책거리화에서 확연한 평면성과 색채성이야말로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민화는 예로부터 평면적이었어요. 같은 시기 중국의 불화에 비할 때 고려의 불화도 평면적이죠. 원근법이 약화된 거라기보다 민간에 이르러 원래 우리의 평면성을 회복한 거예요. 색깔은 다른 한자문화권의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만 끝까지 오방색을 고수한 덕이에요. 간색을 멸시했기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색만 썼어요. 그런데 조선조의 문인화 전통에서는 색 자체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죠. 평면성과 마찬가지로 민화에 와서 색깔을 회복한 거예요.”

책거리화는 왕실과 상류층, 평민이 두루 즐겼던 그림 양식이지만,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은 화원이 아닌 이름 모를 화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책거리화는 외래문화가 창조적으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조는 정치와 정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유의 폭발에서 나온다는 전언 처럼 보이기도 한다. 민간의 책거리화는, 예술의 두 축인 양식과 상상력 가운데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창구다.

조선 사람들의 일생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병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병풍 앞에서 돌잔치를 열었고, 장원 급제나 혼인, 회갑연에서도 병풍 앞의 삶은 계속됐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병풍 뒤에 눕혔다. 병풍은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책거리화를 비롯한 조선의 그림 대부분이 병풍에 그려졌다. 그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화판이었다. 병풍에 길상적인 도상이 풍부한 배경이었다.

소재가 책과 책가로 바뀌었을지언정 길흉화복을 비는 병풍의 특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관대작의 책거리화에서는 골동취미와 식견을 뽐내는 게 좀 더 우세했다면, 평민의 책거리화에서는 노골적으로 복을 빌었다. 이를테면 수박은 씨앗이 많아서 다산의 의미로, 공작 꼬리는 출세의 의미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평민의 집안 규모는 작았기에 책가는 없어졌지만, 여러 가지 길흉화복의 상징물을 최대한 많이 넣다 보니 화폭은 말할 수 없이 빽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빼지는 않았다. 도대체 조선 사람들에게 책은 뭐였을까?


<책가도>, 10폭 병풍 중 3~6폭, 19세기, 비단에 채색, 143×384cm, 개인소장.


많은 학자가 한국인은 책을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말한다. 전 세계 30개국 중에서 한 달 평균 0.8 권으로 독서량 꼴찌라는 기사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판국이니 지금을 말하는 것 같진 않다. ‘문치주의’를 천 명한 조선을 말하는 걸까. 왕이 책으로도 모자라 책거리화를 장려하고, 책거리화가 몇 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유행한 나라는 유래가 없다. 과거 시험이라는, 고전 독서로부터 시작되는 출셋 길이 5백년 동안 유지된 건 어떤가. 하지만 박제가의 <북학의>의 한 토막을 보면 과연 조선 사람들이 책을 사랑했을까 되묻게 된다. “내가 한번 유리창(청대 북경 남쪽의 지명)의 서사(서점) 한 군데를 들어가 보았다. 서사의 주인이 피곤에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매 문서를 뒤적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쾌(책 거간꾼, 책장 수)가 책 한 종을 옆구리에 끼고 사대부 집을 두루 돌아다니지만 어떤 때는 여러 달 걸려도 팔지 못한다.”

적어도 책거리화를 놓고 보면 책을 사랑하는 민족이라 기보다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라는 설명이 합당할 것 같다. 북유럽에서는 아이들 방에 올빼미 그림을 놓는다. 올빼미가 총명함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민화 책거리는 학업 정진이나 출세의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민간신앙이 미신 취급을 받는 현대에 와서도 인간의 신화적인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병재 작가는 말했다. “지금은 역원근법으로 건물을 그리고 있고, 책장을 그린지는 좀 됐는데 지금도 주문이 들어와요. 책 그림을 사무실이나 거실에 두려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어떤 상징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책은 과시의 수단이며, 지식과 지혜를 대표한다. 하지만 뜨거운 교육열과 맞물려, 한국에서 책은 책이라기보다 권력이다. 민간의 책거리화에서 돌출되었던 청신한 자유로움은 지금도 책이라는 질서에 억압받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고전을 읽을 수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공부해야 할 필요도 모른 채 열심히 공부해놓고 이제는 책을 저주하는 사람들, 책을 읽어온 시간을 낭비라고 여기고 과감히 책을 버린 사람들 모두 책을 통해서 책을 잃었다. 독서에 관한 특권의식이 오랜 시간을 지배해온 이 나라에 제대로 된 독서문화가 있지 않은 것만 봐도 자명하다. 책은 모든 사람의 날개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책은, 지혜와 상상력을 틀어막는 도구다. ‘아름다움의 편을 드는 자유’를 빼앗는 무기다.

정조가 책을 장려하기 위해 강조한 그 책거리화는 민간으로 내려와 어떻게 되었던가. 현대인의 시각에 가까운 진보적인 작품은 누가 그린 것이었나. 지知 없는 미美는 가능하다. 하지만 미 없는 지를 가진 사람은 ‘책거리화를 제2의 한류로’라고 말할 것 같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는 걸 알아야 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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